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
  • 방석영<무심고전인문학회장>
  • 승인 2018.01.25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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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 방석영<무심고전인문학회장>

3년여 동안 한 달에 두세 번씩 다녔던 작업실 근처의 00온천. 특히 늦은 가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무렵부터 온천을 찾는 일은 더욱더 잦아진다.

그렇게 3년여를 드나들며, 지하 주차장에 차를 파킹하고 주차장에서 건물 내부로 통하는 자동문을 지나 복도에 서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곤 했다.

그런데 복도 천정에 만국기와 더불어 형형색색의 풍선들이 낡은 모습을 띠며 달려 있는 것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2층의 매표소 직원에게 확인한 결과, 지하 1층 복도 천정에 만국기와 풍선들이 매달려 있는 것은 적어도 3년여 전부터였다.

그동안 온천욕을 하러 종종 들렸으면서도 지하 1층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자동문을 통과한 뒤 복도에 서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단 한 번도 오늘처럼 고개를 들어 복도 천정에 마음을 주지 않았음이 확실하다.

차를 대고 곧바로 자동문을 지나 엘리베이터로 다가가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2층으로 이동하는 일만을 반복했음이 틀림없다.

3년여 동안 그렇게 무심하게 지나치다가 오늘 드디어 고개를 들어 복도 천정에 마음을 주었고 그곳에 매달려 있는 만국기와 풍선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주변의 온갖 것들은 내가 마음을 내서 다가서고 바라볼 때 비로소 인연을 맺게 된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김춘수 시인은 `꽃'이란 시를 썼을까? 갑자기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가 생각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마음의 짓는 바인 까닭에 마음에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아침 출근길 현관문을 나서면서 하늘에 마음을 주는 일 없이, 하늘을 바라보지 않으면 내게 하늘은 없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비로소 내가 하늘에 가 닿고, 하늘도 내게 다가와 하나가 된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내가 너에게 다가가고, 네가 나에게 다가올 때 `너'와 `나'는 비로소 `우리'가 된다.

그렇게 하나가 되어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서로의 기쁨을 나눌 때 행복한 삶을 누리며 상생(相生)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 같은 사실을 역설하는 가르침이 있다.

사서삼경 중 하나인 대학(大學) 정심장(正心章)에 나오는 “心不在焉(심부재언) 視而不見(시이불견) 聽而不聞(청이불문) 食而不知其味(식이부지기미)” 즉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는 구절이다.

새해에는 별생각 없이 지나치던 거리와 그 거리의 가로수들, 분주한 일상에 쫓기며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골목과 그 골목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눈인사라도 건네며 따듯한 마음을 나누고 싶다.

그렇게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살다 보면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 마지막 구절처럼 “나는 너에게 / 너는 나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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