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추운 해
가장 추운 해
  • 정세근<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8.01.2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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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 정세근

내가 믿지 못하는 것이 있다. `올해가 가장 추워', `올해가 제일 더워'라는 말이다. 왜냐? 이런 말은 매년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분명 올해가 가장 춥거나 더울 수 없다. `올 들어 가장 춥다'든가, `3년 만의 더위'라든가, `10년 가운데 가장 추운 해'라면 모를까.

그런데도 우리는 왜 매년 올해가 가장 덥거나 춥다고 느낄까?

그것은 우리의 감각이 아무래도 지난 일에는 둔하고 당장 벌어진 일에는 민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만큼이나 감각도 잊힌다. 어른들 하는 말이 있잖은가. 아이 낳은 고통을 잊지 못하면 다시는 애를 안 낳을 텐데, 가장 쉽게 잊는 고통이 산통이라고.

달리 보면 기억이나 감각도 믿을 것이 못 된다. 기억에는 이성의 영역도 있지만 감각의 영역도 있는 것이다. 아팠던 기억, 슬펐던 기억, 쓰라린 기억, 서글픈 기억, 즐거웠던 기억은 회상이라는 매개를 통해 이성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듯하지만 그 심연에는 어떤 감각이 똬리를 틀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 감각은 본능과 연관되어 순식간의 판단을 가능케 한다. `숨어라', `튀어'를 비롯하여 `내 맘에 드는 사람'(남녀끼리)이라는 판단이 1-2초를 넘지 않는 것도 그것이 차근차근 이루어진 추리(이성을 굴리기; reasoning)라기보다는 감각(감정에 충실하기; sensibility)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 이성을 뛰어넘는 감각의 영역을 최대로 이성에 가깝게 설명하고자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직관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것은 추론(推論: reasoning)하지 않기 때문에 이성(理性: reason)의 것이라고 부르기 어색하다.

`오늘이 가장 춥다'고 할 때, 오늘 집에서 나가지 않고 아랫목에서 엉덩이를 지지고 있던 사람은 쉽게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은 오히려 산술화된 수치로 일기예보 속의 온도다. 숫자가 추위와 더위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바람이 많이 불면 `체감' 온도라는 것도 발표한다.

재밌는 것은 `오늘이 가장 춥다'는 말보다 `오늘이 가장 덥다'는 말이 많이 나온다는 점이다. 과학적 근거도 없는 나의 경험치지만 대체로 그렇다. 그건 우리나라가 살만해지면서 추위 걱정은 문명의 혜택으로 덜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만약 예전처럼 웃풍이 심하게 들어 윗목의 자리끼가 얼 정도의 추위에 계속 노출된다면 `올해가 가장 춥다'는 말이 `올해가 가장 덥다'는 말처럼 매년 나올지도 모른다.

또 하나, 경제도 그렇다. 장사꾼의 상술인지 엄살인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입에서 `경제가 잘 돌아간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1980년대 `단군 이래의 호황'이라는 시절이 있은 후, 듣지 못한 것 같다. 사실 IMF 체제 때에도 수출하는 사람은 횡재를 보기도 했다. 환율이 올라가니 수출 대금이 두 배씩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난 쉽게 `가장 덥다'거나 `가장 춥다'고 말하지 않는다. `올해 눈이 참 많이 온다'거나 `올해 웬 비가 이렇게 많이 와'라는 말도 쉽게 믿지 않는다. 내가 차라리 믿는 것은 사람들이 내년에도 여전히 `올여름은 왜 이렇게 더워'라고 말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난 이제 그 표현이 과학이라기보다는 공감의 언어라는 것을 깨닫는다. 기쁨과 고통에 공감하듯이 더위와 추위도 인간이라는 이 동물은 교감하고 싶은 것이다. 행복과 고통을 나누는 것의 일종으로 맹추위와 무더위도 함께 느낌을 나누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역시 공감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나도 오늘이 가장 춥다.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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