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최저임금,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8.01.23 20: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요단상
▲ 정규호

아내는 아직도 공장엘 다닌다.

나는 이 문장에서 `아직도'와 `여전히'사이에서 적지 않은 고민을 했다. `아직도'는 `때가 되지 않은'의 뜻에, 어쩐지 불가항력적 의미가 속해 있는 듯하고, `여전히'는 `전과 다름없이'라는 비슷한 의미에도 구속력이 훨씬 덜한 느낌이 있다.

각설하고, 변변치 못한 남편 탓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인 아내에게 일요일은 그야말로 황금 같은 시간이다. 나 역시 일요일은 그런대로 편안한 시간인데, 대개는 새로 시작되는 한 주를 준비하기 위해 다만 몇 시간이라도 꼬박 출근을 하는 습관이 몸에 밴 탓에 서로 엇갈리기 일쑤다.

그런 라이프 사이클의 차이로 인해 그저 아무런 기척도 없이 편하고 싶은 나와, 모처럼 쉬는 날 미처 할 수 없었던 인간관계를 위한 여기저기에서의 전화 통화가 잦은 아내와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경우가 잦다. 급기야 어느 일요일, 내가 `휴일에 전화를 하는 몰상식함'에 불만을 토로하다가 큰 다툼으로 번질 위기를 맞기도 했다.

아! 나는 여태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공장 일을 하는 아내는 출근과 동시에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돌아가는 하나의 부속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간으로서의 직장 생활을 하는 나는 아주 가끔 짬을 내어 사람들과 연락도 하고, 교류를 핑계로 저녁약속도 하며 희희낙락할 수 있지만 아내는 전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아내는 갑자기 준수되는 법정근무시간과 잔업의 감소, 그리고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고용안정에 전전긍긍하며 결코 늘어날 수 없을 것으로 보이는 월급의 액수를 한탄한다.

지난해보다 16.4%, 7530원으로 늘어난 최저임금의 그늘이 심상치 않다. `사람답게 사는 삶'을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최저임금이라는 한계가 늘어났음에도 정작 최하위 계층의 노동자가 손에 쥐는 월급은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은 분명 문제다.

최저임금 인상은 당연히 소득주도 경제의 핵심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그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시작이 잘못되었다. 우선 큰 폭으로 인상되는 최저임금의 신기루에 정부와 피고용자들이 너무 쉽게 도취돼 있었다. 당장 산정 주기를 따지지 않고 1개월 단위로 지급되는 상여금을 최저임금 산입 범위에 포함시키자는 최저임금위원회 전문가 TF의 다수 의견으로 인해 사업장마다 편법이 난무한다.

상여금을 기본급에 포함시키는 교묘한 수단과 더불어 복리 후생비 산정 및 지급 기준의 변경, 휴일 및 야간 연장 근로의 축소, 식대 등 수당의 폐지와 휴게시간의 확대 등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착취의 기발한 수단과 방법이 최저임금 인상의 무력화를 기도하고 있다.

시작은 이래야 했다. 재벌 중심의 성장 주도의 경제의 폐단과 상위 1%에 집중된 부의 불평등의 심화를 먼저 알리고 이를 타개하는 일을 선행해야 했다.

절대로 나눔에 익숙하지 않은 세태임을 먼저 깨닫고, 크든 작든 임금을 주는 고용주들이 적어도 그동안의 `내 것'을 빼앗기게 됐다는 억울함을 달래줄 공감대를 우선 만드는 교육과 홍보를 서둘러야 했다. 임금을 주고받으며, 또 그로 인해 누려야 할 소득과 소비의 구조와 경제 활성화의 가능성에 대한 큰 그림이 제시될 수 있어야 했다.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적어도 아주 소박한 꿈을 위해 얼마간의 저축도 하고,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문화 향유 등 생활의 여유를 즐겁게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먼저 만들어 줬어야 했다.

아무래도 나는 정책입안자들이 계층 간, 그리고 소득 수준 간에 별개로 작용하는 처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고 믿는다. 정책을 실행하기 전에 찾아야 할 현장을 실행 이후에 찾는다는 것부터 모순이다. 수없이 많은 중간착취의 폐단 역시 `나눔'이 아닌 `빼앗김'의 설움을 커지게 하는 요인이다. 월급생활자 대부분의 최저임금 인상 후 첫 월급날이 다가오고 있다. 월급이 오르기는커녕, 오히려 깎일 수도 있다고 울상인 아내의 일요일.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진짜 명언임을 새삼 깨닫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