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중의 마지막 충언을 따르길
김희중의 마지막 충언을 따르길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8.01.2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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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 권혁두 국장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적폐청산 명분으로 진행되는 검찰 수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정치보복”이라고 주장했다. 또 “국가에 헌신한 공직자들을 불러 괴롭힐 게 아니라 내게 직접 물으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성명을 낸 자리에 진을 치고 기다렸던 기자들에게 물을 기회조차 주지 않고 바로 자취를 감췄다.

무엇보다 그가 당하고 있다는 정치보복의 성격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발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한풀이에 혈안이 된 청와대와 검찰이 무고한 자신을 옭아매고 있다는 주장으로 들린다. 그렇다면 굳이 노 전 대통령의 죽음까지 언급하며 방패를 칠 수고까지는 할 필요가 없었을 것 같다. 대한민국 검찰이 신출귀몰한다지만 없는 사실까지 만들어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낼 수 있는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니 말이다. `내게 물어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먼저 말하길 권한다. 즉각 검찰 수사를 자청해 현 정권으로부터 받고 있는 부당한 박해를 국민에게 알리고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

그의 발언은 다른 뜻으로도 들린다. `국가 전반을 관리하는 대통령의 특수한 책무를 감안해 임기 중 발생한 웬만한 과실은 눈을 감아주는 것이 전임에 대한 예우요, 국가에도 이롭다'는 주장이 읽혀진다. 쉽게 말해 전 대통령의 불법을 들춰내 수사하는 것은 국익에 유해한 정치보복에 해당한다는 논지다. 국정원 특활비 상납과 관련해 그의 측근들이 검찰에서 앞다퉈 쏟아낸 증언들로 미뤄 이 전 대통령 발언의 진의는 후자에 가까울 것 같다. 그의 가신들이 몸이 달아 “우리도 노무현 정권 때 일을 알고 있다”거나 “MB를 잡아가려 하면 전쟁이 난다”는 엄포를 놓는 것을 보면 확신이 더 커진다.

이 지점에서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지난 2009년 검찰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수사하던 과정에서 한 방송에 `논두렁 시계'가 보도됐다. 당시 노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로 수사받던 박연차 회장이 대통령 부인인 권양숙 여사에게 1억원짜리 시계를 전달했고, 검찰 수사가 임박하자 논두렁에 버렸다는 내용이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시계의 존재만 빼고 나면 허구에 가까운 보도였다.

이후 드러난 사실 관계를 종합하면 대충 이렇다. 박 회장이 재임 중 회갑을 맞은 대통령에게 시계를 선물한 것은 맞지만, 대통령의 형인 노건평씨를 통해서였다. 노건평씨는 펄쩍 뛸 것이 뻔한 동생에게 시계를 전하지 못하고 자신의 아내에게 맡겼다. 시계는 대통령 퇴임 후에야 권 여사에게 전달됐다. 권 여사 역시 받아서 보관만 하다가 자택 압수수색이 예상되자 뒤늦게 남편에게 시계를 알렸고, 격분한 대통령이 망치로 부숴서 버렸다는 것이다.

지난달 국정원 개혁위는 당시 국정원이 검찰에 `권 여사의 시계 수수 사실을 언론에 흘려 망신을 주자'는 제안을 했다는 자체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수사를 지휘했던 이인규 전 중수부장도 최근 “국정원 직원 2명이 찾아와 당시 원세훈 국정원장의 뜻이라며 `시계 수수를 언론에 흘리자'는 주문을 해 거절했다”고 시인했다. 노 전 대통령의 허물 찾기에 혈안이 됐던 국정원이었지만 대통령이 직접 시계를 받아 사용한 것도 아니니 사건화하기에는 부족했을 터이고, 그렇다고 그대로 덮고 가기에는 아까운 소재였을 것이다. 그래서 언론에나 알려 대통령의 청렴 이미지에 흠집을 내고 수사의 당위성을 확보하자는 목적으로 검찰을 꼬드겨 호응을 받았을 정황이 짙다. 시계가 전달되고 버려진 경로 등 세세한 사실 관계는 감췄을 테고, `논두렁에 버렸다'는 악의적 각색만 더해 민심을 자극하려 했을 것이다. 정보기관과 사법기관이 국민에게 모욕감을 주고 세상에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입건할 사안도 아닌 내용을 언론에 하청한 행위야말로 권력남용을 넘은 졸렬한 정치보복이다.

정치보복은 국민이 국정원에 맡긴 혈세를 제 지갑의 돈처럼 가져다 썼던 사람이 입에 올릴 언어가 아니다. 따라서 그의 성명은 이런 식이 됐어야 했다. “나는 전 대통령이 주변 관리를 못 한 실수를 덮어주기는커녕 청렴을 가장한 파렴치범으로 몰아가는 등 잔혹한 방식으로 정치보복을 한 우를 범했으나, 문재인 정권에서는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국회의원에서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15년간 분신처럼 곁에서 충성했던 김희중 전 부속실장의 마지막 간언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은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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