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사람, 우암 - 정렴(2)
큰 사람, 우암 - 정렴(2)
  • 강민식<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 승인 2018.01.2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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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 강민식

대윤과 소윤의 싸움. 외척 갈등이 빚어낸 사림들의 참혹한 죽음 등 4대 사화의 끝자락 을사사화에 대한 기억이다. 드라마나 소설 속, 선악의 대결처럼 비춰진 이야기가 풍부한 사건이기도 하다. 익숙하지만 무고한 죽음과 악역에 대한 역사의 가혹한 평가는 비켜갈 수 없다.

어쩌면 삼현려 비의 속사정은 을사사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당대 삼현으로 정렴(鄭磏)을 꼽았으나, 어떤 연유로 그의 증조 송귀수로 바뀌었다.

먼저 정렴(1505~1549). 그는 동생 정작(鄭碏)과 함께 단학의 도사니, 선가(仙家)의 비조로 알려져있다.

실제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으니, 오히려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가 적지 않다.

본관은 온양이다. 정렴은 청주 세거 성씨의 하나인 진주 유씨 집안에 장가들어 이곳과도 인연이 깊다. 그런 이유로 그와 학문을 나누었던 이들이 많다. 그래서 현도면 하석리의 노봉서원에 모셔진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부친 정순붕(鄭順朋)은 을사사화 때 많은 사람을 죽음에 빠뜨린 인물 중 한 명이다. 아버지를 거듭 말렸으나 듣지 않고 동생마저 귀양가자 뜻을 잃고 병들어 죽고 말았다.

게다가 다른 동생 정현은 형을 죽이려 했으니 혈육에 대한 상실감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을사사화로 처삼촌인 유인숙(柳仁淑)과 그의 네 아들은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그의 자취는 <어유야담> 같은 야사류와 두 종류의 시문집에서 찾을 수 있다. 정작의 외손인 채형후(蔡亨後)가 계곡 장유(張維)에게 서문을 부탁하여 완성한 <북창고옥양선생시집(北窓古玉兩先生詩集)>, 그리고 앞서 이야기 한 <삼현주옥>이다.

모두 시를 모아 놓은 책이나 서문과 발문 등을 통해 정렴의 자취를 이해할 수 있다. 한결같은 내용이다. 아버지로 인해 뜻을 버리고 도석(道釋, 도교와 불교) 속에서 놀며 숨어 살다 죽었다고 한다. 수련을 통해 통달한 재주를 가졌음에도 단명에 그친 이유로 충분하다.

실제 노봉서원에 모셔진 것을 보면 이 지역에 미친 학문적 영향이 적지 않았음에도 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잡류에 그친 것이다. 그 자신 양주(楊州)에 숨어 살고, 그곳에 묻혔지만 옛 문의와의 인연은 노봉서원과 둘째 아들 정지임의 무덤으로 남아있다.

동생 정작은 박지화(朴枝華, 1513~1592)에게 배웠다. 박지화는 서얼로 태어났으나 서경덕에게 배워 기수학(氣數學)의 으뜸으로 꼽힌다.

80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포천 혹은 춘천에서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청주 가까이 묻히고 청안에서 옮겨 세운 구계서원에 배향되었다.

김시습-서경덕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잇고, 토정 이지함, 고청 서기(徐起)와 교유하였다. 방외인(方外人)의 계보는 청주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한편 아버지의 잘못으로 숨어 산 정렴은 시간이 흘러 아버지를 배척하지 못한 윤증(尹拯)에 대한 공격의 빌미로 되살아났다. 정렴 대신 증조를 내세운 그가 병자호란 때 처마저 자진케 하고 구차하게 살아남은 윤선거(尹宣擧)를 논박할 때 빠뜨리지 않던 `강도(江都)의 일'이었다. 그에게 대명의리와 복수설치(讐雪恥)는 혈육으로 정묘호란 때 순절한 큰 형 송시희(宋時熹)와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순절한 사촌형 송시영(宋時榮)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가 남긴 삼현려 비 뒤에 송시영의 묘가 있고, 마을 안쪽에 부조묘인 충현묘(忠顯廟)가 있다. 송귀수는 그들의 증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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