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지정(師弟之情)
사제지정(師弟之情)
  • 신금철<수필가>
  • 승인 2018.01.18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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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신금철

강한 샛바람이 몰려 와서 세상에 쌓였던 먼지를 털어내고 난 뒤, 잣눈이 소복이 내려온 세상을 하얗게 씻어낸다. 대청소를 말끔히 마친 하늘은 투명하고 대지는 더욱 반짝인다. 메마르고 때 묻고 얼룩진 인간의 마음도 대청소를 해 줄 수 있는 신의 선물이 내렸으면 좋겠다. 그러나 때 낀 세상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사건들은 점점 강도가 높아지고 사람 사의의 믿음과 정도 사라지고 있어 옛정이 그립다.

50여 년 전 제자에게서 새해 안부 문자를 받았다. 제자는 빛바랜 흑백사진도 올렸다. 열한 살 소년과 스무 살 선생님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다. 그 사진은 나도 사진첩에 보관하고 있었기에 곧바로 제자와 나라는 걸 알았다. 사진을 들여다보니 짧은 커트 머리에 떨렁한 하얀 바지와 블라우스를 입고 운동모자를 쓴 내 모습이 촌스럽기 그지없었다. 기억 저편에서 웃고 있는 내 모습과 함께 아련한 추억이 되살아났다.

첫 발령이어서 어설프긴 했지만 온 정열을 다 쏟은 제자들이다. 가까운 곳에 사는 아이들 대여섯 명을 자취방으로 불러 밤늦도록 공부를 가르쳐 주고,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광산 고개를 넘지 못하는 아이들을 내 자취방에서 잠을 재우고, 4학년인데도 문자해득을 못 하는 아이들을 퇴근시간까지 붙들고 공부를 가르치던 시절이었으니 제자와 스승의 관계가 끈끈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새 첫 제자들의 나이도 환갑을 바라보고 있다. 제자들과는 가끔 안부 인사를 나누고 내가 근속 30주년이었던 해에 함께 몰려와 식사하며 지난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했다.

42년 동안 가르친 제자들이 모두 연락을 하고 지내진 않지만 몇몇 제자와는 지금도 사제의 정을 나누고 있다. 스승과 사제의 정을 나누는 이들이 많겠지만 옛날처럼 제자들과 함께 밥을 해먹고 마을 청소도 하며 정이 들어 훗날까지 사제의 정을 나누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가끔 옛 동료를 만나면 학교 현장이 옛날 같지 않다고 한다. 학력 위주의 교육제도가 불러온 지나친 경쟁과, 자칫 인권 침해로 아이들을 힘들게 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생활지도가 힘이 들고, 교우 관계도 지도가 어렵다고 한다.

손녀의 유치원 졸업식에 참석한 일이 있다. 졸업의 의미를 잘 모를 나이어서인지 아이들은 축제 분위기처럼 밝고 즐거워보였다. 그런데 손녀의 담임선생님은 계속 훌쩍거리며 우느라 사회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손녀의 담임선생님은 얼굴도 예쁘고 항상 웃는 낯이며 상냥하고 아이들을 자식처럼 돌보는 분이다.

손녀는 선생님을 엄마처럼 따르고 집에 와서도 선생님 자랑을 많이 하였다. 집에 와서 물으니 선생님이 울어서 자기도 슬펐다고 하며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손녀는 지금도 가끔 유치원선생님이 안아 주었다고 행복해 한다.

이제 머지않아 졸업 시즌이 다가온다. 진정으로 학교생활의 끝남이나 스승과의 이별이 아쉬워 눈물 흘리는 학생들은 찾아볼 수가 없는 먼 이야기가 되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벽이 되는 지금의 학력 위주의 교육제도에 아쉬움이 남는다. 교사들은 부모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학생들은 부모를 존경하듯 서로 신뢰하여 사제지정으로 이어지는 따뜻한 정情이 넘치는 학교가 되었으면 좋겠다.

며칠 후면 제자의 딸 결혼식이 있다. 50여 년 전 제자들을 만날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이제 함께 늙어가는 그들과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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