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민, 꾸리치바 그리고 가상화폐
그라민, 꾸리치바 그리고 가상화폐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8.01.16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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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소액대출 은행이다. 경제학자 무함마드 유니스가 1976년 처음 설립한 이 은행은 150달러 미만의 돈을 담보와 신원 보증 없이 빌려준다. 단, 조건이 있다. 아주 낮은 이자를 부담하도록 혜택을 주면서 하위 25%에 해당하는 사람만 대출이 가능하다. 빈곤 퇴치의 세계적 성공사례로 손꼽히는 그라민은행은 현재 연간 3조3600억원을 대출해주는 대형은행으로 성장했다. 놀라운 것은 담보와 신원 보증이 필요 없는 대출조건에도 상환율이 연평균 90%를 웃돈다. 담보가 없어 은행돈을 대출받을 수 없고, 이로 인해 가난이 되풀이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낼 수 있는 성공적 빈민 구제 대책의 귀감이 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 2006년 그라민은행과 무함마드 유니스가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유니스는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문을 통해 “기업이란 의미를 보다 폭넓게 정의하면 우리는 자본주의의 테두리 안에서도 지금껏 풀 수 없었던 사회,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기업의 목적을 이윤 극대화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세상을 위한 가치 창출의 개념까지 포함해 생각할 필요가 여기 있다”고 말했다. 어디 기업뿐 이겠는가. 개인이든 사회 전반이든 가리지 않고 숨길 수 없는 자본의 탐욕을 따져보면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다.

브라질의 세계적 환경도시 꾸리치바는 도시의 여러 가지 혁명적 대안 가운데 `쓰레기 아닌 쓰레기'정책이 유독 눈길을 끈다. 꾸리치바는 쓰레기 구매 정책을 통해 도시 환경과 빈민 문제를 동시에 해결했다. 함부로 버려지는 빈민가의 쓰레기 수거 및 처리에 애를 먹었던 꾸리치바시는 쓰레기 구매와 녹색교환이라는 정책을 도입했다. 도시 빈민들이 쓰레기를 수거해오면 상품으로 교환해 준다. 처음에는 버스 토큰을 주다가 점차 지역의 잉여 농산물과 장난감 등으로 교환해 주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도시가 깨끗해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면서 지역 농민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 주목할 것은 이 과정에서 지역화폐로 교환해주는 방식인데, 이 지역화폐는 감가상각이 있다. 일정 기간이 지나도록 오래 쌓아두면 액면가가 줄어드는 제도를 채택해 부(富)의 축적 대신 화폐의 교환기능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당연히 돈의 흐름이 원활해지면서 경제는 활력을 얻는다.

가상화폐 출현 당시의 본질은 달러가 전 세계의 자본과 금융이 경제를 지배하는 횡포, 즉 철저하게 제도권의 통제를 받는 법정 화폐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한 민간의 순수성에 있었다.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자본의 수익률이 생산과 소득의 성장률을 넘어설 때 자본주의는 자의적이고 견딜 수 없는 불평등을 자동적으로 양산하게 된다.(중략) 이러한 불평등은 민주주의 사회의 토대를 이루는 능력주의의 가치들을 근본적으로 침식한다”고 강조한다.

가상화폐는 이미 탐욕의 탈을 쓴 일확천금의 `악덕'이 되고 있다. `나중에 시세 차익을 얻기 위해 지금 당장 쓰지 않을 재화를 매점하고 과점하면서 투기와 도박과 구별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있다. 토지의 과점을 통한 불로소득의 욕망과 가상화폐가 별로 다를 게 없다.

최저임금에 대한 가진 자와 기득권 세력의 노골적인 저항, 그리고 강력한 규제 방침에도 들썩이는 서울 강남의 집값, 그리고 가상화폐에 대한 과열과 반발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가진 자들의 전유물로 회귀시키려는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손'이 준동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피케티는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호주의적이며 국수주의적인 반발을 피하면서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고 공동의 이익이 사적인 이익에 앞서도록 보장할 수 있는 방법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왜곡되고 부풀려지는 사실과 넘치는 편견을 제대로 깨닫는 일. 기술적 진화의 희망적 예견에도 가상은 아직 가상일 뿐이다. 우리 안에 깃든 탐욕의 귀신을 몰아내고 사람을, 오로지 사람만을 먼저 생각하는 슬기로운 현실이 우리에게 훨씬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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