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내게
바다는 내게
  • 최명임<수필가>
  • 승인 2018.01.15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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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최명임

통영하고도 한적한 산자락에 엉덩이를 쑥 디밀고 앉은 작은 바다가 있었다.

그 곳에 여장을 풀었다. 파도소리 자근자근 돌아들고 거친 바람도 이곳만 찾아들면 고분고분해지는 아늑한 곳이다. 몇 안 되는 어부를 끼고 바다는 그들의 생명줄이 되어 온몸을 내어주고 있다. 어제 잡은 생선이 빼들빼들 말라 가고 남새밭 고랑마다 겨울 푸성귀가 넘쳐 난다. 생전 큰 파도라고는 만난 적이 없을 것 같은 어부 내외가 통통배에서 일상을 낚고 있다. 짐작건대 어부의 삶은 저 잔잔한 바다처럼 그렇게 녹녹했으리라.

그 풍경이 마을 꼬리를 붙들고 냉큼 들어앉은 고향 바다를 닮았다. 나는 자라면서 큰 파도를 만난 적이 없었다. 포도송이를 닮아 포도해라 불리는 고향 바다는 늘 잔잔해서 윤슬을 보며 자랐다. 경포대 우렁찬 파도를 처음 보고는 신기하기도 했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울릉도 가는 뱃길에서 망망대해에 던져진 듯 두 눈을 감았던 것도 그래서였다.

내게 바다는 그런 것이다. 도전과 패기에 찬 바다, 오대양을 합친 대해가 아니라 까닭 없이 들이닥친 매운 바람도 잠재우고 슬그머니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야기를 담아 오는,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아 나를 담을 수 있는 아늑한 고향 같은 것이다. 내게 주어진 삶도 그러려니 했다. 작은 바다에서 자란 탓일까. 한바다 같은 삶을 마주하고 서면 늘 함량미달을 느낀다.

여행 중에는 주부의 자리를 내어주고 받아먹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딸려온 꼬맹이들까지 이 식구들이 집에서라면 코에서 단내가 났을 게다. 싱싱한 해물로 만찬을 준비하는 남편과 아들은 마음이 바쁘고 어미들은 두 몸 추스르기 바쁘다. 들뜬 분위기를 두고 물가로 나왔다.

대열에서 이탈한 홀가분함이 마음을 흔든다. 옅은 어둠이 안개처럼 스미고 있다. 돌아오는 물소리 사위를 울리고 하얀 포말에 돌멩이 자그락거림이 간지럽다. 이 오롯한 분위기가 얼마 만인가. 일상의 온갖 잡음과 소용돌이와 고단함이 내려앉는다.

처마 밑에 등불이 하나 둘 켜지고 있다. 분주한 하루를 마친 어부 내외가 비린내 나는 옷을 벗고 소금기에 절은 손을 막 씻고 있을 거다.

생선 굽는 냄새 풍기는 노모의 굽은 등이 정겨운 소박한 그의 집을 엿보고 싶다. 어부는 아마도 내가 사는 도시의 불빛을 보면 체기를 느끼고, 도심에 서면 울렁증으로 채 사흘을 사는 것도 고역이리라. 그네들을 이웃하고 내처 서너 달 머무르고 싶은 곳이다

종일 햇살에 정제된 돌이 드는 물에 몸을 담그고 마음을 닦고 있다. 고뇌로 깎이고 시간으로 닦아내는 구도자의 가슴도 저리 둥글까. 얼마나 긴 세월이어야 저토록 원만(圓滿)할 수 있을까. 내 눈에는 만족하건만 파도는 저다지도 엄한 다그침이다. 육신마저 사라지면 죽비소리도 그치려나. 몇 겁을 흘러온 바다 앞에서 나는 얼굴을 붉힌다.

어둠이 바다를 가득 채웠다. 귀항하는 만선의 희락이 불빛으로 춤을 춘다. 출항하는 밤배는 파도를 가르고, 멀리 띄엄띄엄 떠도는 불빛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저기 부두에 매인 배는 무엇일까. 집착인 듯 멍에인 듯 단단히 묶여있다. 매인 배가 내 안에서 술렁인다. 통로를 찾는 내가 흔들리는 소리다.

이 저녁 세상사에 얽매인 범인(凡人)의 가슴으로 밀물과 썰물이 고동치며 들락거린다. 바닷돌을 닮으라는 다그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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