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사람 우암 - 삼현려
큰 사람 우암 - 삼현려
  • 강민식<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 승인 2018.01.14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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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 강민식<백제유물전시관 학예실장>

무릎 앞에 놓인 사약 한 사발. 스스로 죽으라 하고 쉬 죽으라 극약을 내린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하고 한숨에 들이킨다. 죽음의 순간, 이마저도 다른 극단의 평가가 따른다. 제주에서 불러올린 임금의 명에 따라 죽음을 예감하며 곡기마저 끊은 그다.

1689년 기사년. 전날 정읍에 닿아 하루를 머물고 이튿날인 6월 8일 임금의 후명(後命)을 받는다. 미리 돌아가신 부모님께 올리는 글과 자손을 깨우치는 글, 거기다 제자에게 장례 절차마저 소상히 전한 후다. 그런데 그 와중에 뜻밖의 글을 남긴다. 6월 3일 장성에 도착하여 삼현려(三賢閭) 비를 쓴다. 세 어진 이가 살던 마을이란 뜻이다.

청주시 남일면 화당리 문오 마을 입구에 삼현려 비가 있다. 삼현은 송귀수(宋壽), 송인수(宋麟壽), 성제원(成梯元) 셋을 말한다. 모두 송세량(宋世良, 1473~1539)의 두 아들과 사위이다. 송세량은 그의 부인, 문화류씨에게 장가들어 이곳 화당리 처가에 터전을 잡았다. 입향조라 한다.

송인수(1499~1547)는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이곳에서 사사된 인물이다. 화당리 마을 입구에 후손들이 유허비를 세워놓았다. 송인수는 청주 신항서원과 노봉서원에 모셔진 청주를 대표하는 사림(士林)이다.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청주로 낙향하였다가 1547년 일어난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았다. 성제원은 처사(處士)로 보은현감에 그쳤지만 뛰어난 학문으로 이름났다. 보은 상현서원에 모셔져 있다. 그런데 송귀수는 다소 생경하다. 다만 `그'의 증조로 기억한다.

원래 삼현려는 서울 반송방 유점동이라 한다. 한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곳 청주로 옮겨왔다. 직계 조상의 청주 입향을 알리는 표석으로 이해할 뿐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죽음을 앞두고 쓴 글이라 더욱 의아하다. 죽음의 끝자락에서 가장 부여잡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런데 삼현은 이미 1578년 성제원의 당질 성수익(成壽益)이 펴낸 <삼현주옥(三賢珠玉)>에 송인수와 성제원, 그리고 정렴 세 사람이라 하였다. 이 책은 그들 세 사람의 시문집이다. 후대의 삼현인 송귀수 대신 1505~1549)이 들어 있다. 정렴은 진주유씨에게 장가들어 지금의 현도면 노산리에 머문 적이 있다. 이곳에서 많은 사림들과 교유한 결과 노봉서원에 송인수와 함께 배향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임진왜란 이전 청주에서 활동했던 이들은 나름 학문적인 성취를 이룬 인물들이다.

실제 삼현려비를 쓴 그도 생전에 이 책을 본 적이 있다. 그럼에도 정작 정렴이 빠진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히 조상에 대한 추모와 현창의 결과물로만 볼 수 있을까. 그는 일찍부터 삼현을 말하였다. 가문을 드러내기 위해 과거에 힘쓰라는 부친이 더불어 명현(名賢)으로서 입향조의 두 아들과 사위를 자랑스러워 하였다. 한편 당대 문사들이 쓴 입향조와 백부의 묘갈에는 단지 자손과 선대에 대한 언급에 그칠 뿐이었는데, 1669년 그가 덧붙인 고조의 음기(陰記)에 삼현려를 처음 언급하였다. 이후 죽음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 의지를 글로써 남겼다. 무엇이 그토록 간절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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