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갑잖은 3만달러 시대
달갑잖은 3만달러 시대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8.01.14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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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 권혁두 국장

돈을 많이 벌수록 키가 커지는 나라 사람들이 모두 나와 딱 1시간 동안 행진을 하기로 한다. 걷는 순서는 키, 즉 소득 수준에 따라 정해졌다. 머리가 땅 밖으로 나오지 않아 지하에서 걷는 사람들이 스타트를 끊는다. 소득은커녕 빚 만지고 사는 마이너스 인생들이다. 보이지도 않는 이들의 행렬에 이어 키가 서너㎝에 불과한 개미 인간들이 나타난다. 번 돈으로 입에 풀칠하기 바쁜 사람들이다. 행진하는 사람들의 키가 커지는 속도는 더디기 짝이 없다. 30분이 지났지만 1m를 돌파하지 못한다. 48분이 지나서야 평균 신장인 175㎝에 도달한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키가 자라는 속도가 빨라진다. 55분이 지나면서 수십m가 넘는 장신들이 나타나고 행진이 끝나갈 때쯤에는 머리가 하늘까지 닿아 끝이 보이지 않는 거인들이 등장해 피날레를 장식한다.

네덜란드 경제학자 얀펜이 소득 불균형을 꼬집으며 발표해 유명해진 `난쟁이들의 행진'을 각색하자면 이렇다. 1971년 그가 평균소득의 허구를 꼬집으며 분배의 문제를 제기했지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 계층 간 소득 편차는 더 심해졌다.

조만간 우리도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 돌입한다고 한다. 현재 환율로 1년간 3195만원을 버는 사람이 대한민국 소득 순위의 중간지점에 도달해 있는 셈이다. 이 같은 셈법으로 `내가 이 나라에서 중간은 가는구나'하며 자부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인당 국민소득 산정에는 생산활동을 하지 않는 미성년자와 노령층까지도 포함된다. 국민이 각종 생산활동에 종사해 올린 국민총소득(GNI)을 인구 수로 나눈 것이다. 따라서 일정 규모의 가구를 기준으로 따졌을 때, 소득 순위에서 각자의 위치를 실감할 수 있다. 이를테면 4인 가족이 소득 순위의 평균점에 도달하려면 1년에 1억2780만원, 한 달에 1000만원 이상을 벌어야 한다. 잘나가는 사업가나 재산가가 아니라면 가족 중에 연봉 6300만원 이상을 버는 소득자가 두 사람 이상은 있어야 가능하다. 서민들이 사는 동네에서 이런 집을 찾기란 쉽지 않다.

정부는 국민소득 3만 달러를 자랑스러운 성과로 홍보하고 있지만 대다수 서민들은 자괴감과 열등감을 곱씹는다. 국민소득이 2만 달러에서 3만 달러로 올라서는데 12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 12년 동안 국민의 삶은 오히려 팍팍해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우리나라의 삶의 질 순위는 지난해 29위로 내려앉았다. 2012년부터 계속 내리막이다. 삶의 질 뿐만 아니라 국제기구가 평가한 웬만한 행복지수나 불평등지수, 자살률과 빈곤율 같은 부정적 사회통계들은 바닥을 기고 있다.

3만 달러 달성의 한 쪽에서는 최저임금을 둘러싼 갈등과 논쟁이 한창이다. 최저임금은 사회 구성원이 그 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을 의미한다. 지난 대선에 출마한 후보들 대부분이 임기 내 최저시급 1만원 인상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현 정부가 일단 16.4% 오른 7530원으로 결정해 올해부터 시행 중이다. 하루 8시간씩, 주 5일 일하는 근로자들이 월 157만원은 받아야 최저생활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 정책은 격렬한 저항에 봉착해있다. 피고용인에게 최저임금을 지급하기 어려운 영세사업자들의 반발이 드세다. 감원과 자동·무인화 시스템이 늘어나 오히려 고용률을 떨어트린다는 지적도 나온다. 급료 인상이 생산비용에 반영돼 물가도 들썩이고 있다.

국민소득 3만 달러에 오른 나라가 최저임금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난쟁이들의 행진'에서 드러난 모순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최저임금 언저리에서 고군분투하는 국민이 상대적 다수라는 얘기다.

정부도 국민소득 3만 달러의 내화외빈(外華內貧)을 모르지는 않는 모양이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연초 시무식에서 “3만 달러 도달은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국민이 실감하지 않는 것이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3만 달러에 걸맞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공정, 투명, 정의, 준법을 세우고 불합리한 제도, 관행 등 적폐를 청산해 새 질서를 심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화려한 수사들을 총동원했지만 가슴에 와 닿지는 않는다. `부의 집중과 소득 양극화를 실효적으로 완화할 수 있는 묘방을 짜내겠다'고 해야 바른 답이다. `키다리의 키만 더 늘리는 성장이 아니라, 과실이 중소기업과 서민의 가계에도 분배되는 정의로운 성장을 모색하겠다'고 해야 옳은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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