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샘골 구석기유적
청주 샘골 구석기유적
  • 우종윤<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18.01.07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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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시선 땅과 사람들
▲ 우종윤

대청댐 완공 2년 전인 1978년 7월 10일. 대학생활에서 3번째 맞이하는 여름방학 때 장마 뒤 후덥지근한 날씨에 떠난 발굴조사는 첫날부터 고행이었다.

유적으로 가는 길은 물에 잠기어 발굴장비들을 등에 메고 산을 수차례 넘나들며 옮기다 보니 발굴 시작 전에 몸은 이미 녹초가 되었다.

어렵게 도착한 곳은 문덕초등학교 앞 잡초가 무성한 밭으로 구석기유적을 처음 대하는 나의 눈에는 그냥 방치된 밭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대청댐으로 수몰되기 전까지 마을 사람들이 밭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하던 야트막한 대지(단구면), 바로 이 자리가 약 30,000년 전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처음 찾아와 삶의 터전을 일구었던 곳이다. 이곳이 금강 상류지역에서 최초로 발굴된 청주 샘골 구석기유적이다. 금강과 그 지류가 만나는 두물머리 언저리에 자리하고 있어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삶의 터로 삼는데 특히 선호하였던 입지조건을 잘 갖추고 있다.

유적은 문의면 문덕리 481번지 샘골 마을에 위치하나 현재는 대청댐 수몰지역 안에 잠기어 있다.

유적 명으로 삼은 샘골은 자연부락 명으로 샘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며, 샘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사용하고도 남을 정도로 수량이 많았다고 한다.

한여름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 한 그루 없는 들판에서 진행된 발굴조사는 7월 27일까지 10일간 이루어졌다.

발굴 중 밭 경작 층에서 백제시대 토기와 조선시대 자기, 기와, 상평통보 등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곳은 구석기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삶이 끊이지 않고 지속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같은 공간 속에서 삶의 방식을 달리하였을 뿐 3만 년 동안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샘골 유적의 발굴결과 구석기 유물은 910여 점이 출토되었다. 석기를 만들기 위해 사용된 암질은 석영이 87%로 대부분을 차지하며, 그밖에 반암,사암,규장암 등을 이용하였다. 석영으로 석기를 제작한 다른 유적들과 석기의 크기, 형태, 제작수법 등을 비교할 때 샘골 유적은 석영제 소형석기에 정형성을 띠는 석기들을 제작하여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이 주목된다.또한 후기 구석기시대의 발달된 석기제작기술의 지표가 되는 좀돌날몸돌[細石核], 좀돌날[細石刃]이 보이지 않고, 돌날떼기기술이 나타나지 않는 격지석기 중심의 문화양상을 띠고 있다.

완성된 석기 중 긁개와 밀개연모가 전체유물의 3/4을 차지하는 점으로 보아, 이곳에서 생활하였던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짐승가죽을 벗기고 손질하는 일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화층의 두께, 유물구성, 석기 날의 사용 정도 등으로 볼 때 당시 사람들은 이곳에 오랜 기간 머무르지 않고 잠깐 살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무더운 여름날 힘든 발굴 중 휴식시간에는 1962년 개교하여 1980년 대청댐 완공으로 폐교된 문덕초등학교의 탁구부 학생들과 탁구시합을 하며 잠시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또한 하루에 한 번씩 땀 범벅이 된 몸을 개울에서 씻으며 주변에 흩어진 돌 중에 석기를 찾아 헤매었던 것도 유적과 석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 유적 발굴은 10일간의 짧은 기간 이루어졌지만 나와는 매우 뜻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구석기유적의 첫 발굴로 토양물질의 구성과 색깔을 통한 퇴적층 구분과 의미, 토양쐐기와 단구[段丘]에 대한 이해, 인위적으로 깬 돌[석기]과 자연적으로 깨진 돌과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기초적인 안목을 키워준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샘골 유적과의 인연으로 구석기 조사와 연구를 업으로 삼고 40년간 이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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