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넘는 박달재
울고 넘는 박달재
  • 안태희 기자
  • 승인 2017.12.27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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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 안태희 취재2팀장(부국장)

<디지털제천문화대전>에 나오는 `울고 넘는 박달재'라는 가요의 사연은 애틋하다.

1948년에 발표된 `울고 넘는 박달재'에는 제천 박달재에 남겨진 이별의 슬픔을 담은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과거를 보러 간 자신을 기다리다 숨진 금봉이를 뒤늦게 찾은 박달 도령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은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하나다.

또 다른 유래는 1944년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의 마을 장정 13명이 징용으로 끌려가던 날 동네 부인들이 정성껏 만든 도토리묵을 남편의 허리춤에 달아 주며 고갯마루 서낭당에서 이별했다는 사연이 노랫말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박달재는 제천시 봉양읍과 백운면 사이에 있는 고개이고 제천에서 충주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교통의 요지여서 대외 항쟁사 등 역사의 중요할 길목마다 주목을 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박달재를 수많은 애도의 인파들이 2017년 한겨울에 넘어가고 있다. 비록 새로 생긴 터널을 통해서 오가지만, 그들의 심정은 `울고 넘는 박달재'의 그때와 다를 것은 없다.

연말을 앞둔 제천시내에 닥친 화마는 29명의 소중한 생명을 순식간에 앗아갔다. 반복되는 인재로 무고한 생명이 스러져 갔으니 제천뿐만 아니라 충북 전체가 깊은 슬픔에 잠겼다.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보낸 가족들의 울부짖음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소방관들, 열악한 방재환경과 전근대적인 시스템이 모든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제천은 시와 의회 간 수년째 진행 중인 갈등 등으로 지역사회의 통합에 균열이 생긴 곳이다. 이런 틈 속에서 대형 참사가 발생했으니, 시민들의 상실감과 울분이 그 어느 때보다 클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사건의 원인을 제대로 분석하고, 그에 맞게 다시 고치는 일을 할 것으로 믿는다. 반목 대신 화합을, 고통 대신 치유를 하는 일에 모두 나설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참사 현장에 달려간 수많은 정치인들, 그중에서도 내년 지방선거에 도전할 사람들은 희생자들을 조문하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실천에 옮겨야 한다. 유가족들과 시민들의 집단적 트라우마를 치료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고, 사회통합의 분위기를 다시 만드는 것을 말이다.

이번에도 이름없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많은 생명을 구했다는 것을 위정자들은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선거가 몇 달 남지 않으니까 SNS에서 제천참사 방문인증을 하는 것 아니냐'라는 일부의 따가운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오늘따라 `울고넘는 박달재'의 가사가 와 닿는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임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 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굽이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임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삼가 이번 참사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과 다치신 분들의 쾌유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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