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보다
과거를 보다
  • 권재술<전 한국교원대 총장>
  • 승인 2017.12.21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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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 권재술

과거는 지나간 것이고, 따라서 과거는 영원히 볼 수 없는 사건이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다시 볼 수 없듯이 과거는 볼 수 없다. 정말 그럴까? 정말 우리는 `과거'를 볼 수 없을까? 그렇다면 현재는? `현재'는 볼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 과거를 보고 있는가, 현재를 보고 있는가?

갑돌이가 자기 앞 1미터 떨어진 거리에 있는 갑순이를 보고 있다고 하자. 갑돌이가 보는 것은 지금의 갑순이가 아니다. 빛이 1초에 30만 킬로미터를 가니, 갑돌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10억분의 3초 전 갑순이 모습이다. 갑돌이가 듣는 갑순이 말소리는 갑순이의 모습보다 더 과거다. 소리가 1초에 340미터를 가니, 갑순이 목소리는 대략 0.003초 전의 목소리다. 갑돌이가 듣는 소리는 갑순이가 지금 하는 생각이 아니다. 갑순이는 말을 해 놓고 곧바로 생각이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듣고 있는 갑순이 말은 갑순이의 지금 생각이 아니다. 0.003초보다 한참(?) 전의 생각이다. 갑순이의 `지금'생각을 갑돌이가 알 길은 없다. 갑돌이가 사랑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갑순이라는 것은 착각이다. 갑돌이는 지나간 갑순이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10억분의 3초, 0.003초, 그것은 너무나 짧아서 그냥 `현재'라고 우겨도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밤하늘의 별을 볼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가 보는 밤하늘의 달은 지금의 달이 아니다. 1.3초 전의 달이다. 우리가 보는 태양은 8분 전의 태양이다. 태양계의 가장자리라고 하는 오르트 구름대는 1년 전의 모습,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 캔다우루스자리의 프록시마는 4년 전의 모습, 북극성은 400년 전의 모습, 안드로메다은하는 230만 년 전의 모습이다. 망원경으로 우리가 보는 것은 모두 과거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 어떤 별은 천 년 전, 어떤 별은 만년 전, 어떤 별은 수억 년 전의 별이다. 밤하늘의 별을 본다는 것은 우주의 역사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망원경(望遠鏡)이 아니라 망과경(望過鏡)으로 하면 어떨까?

우주의 나이는 137억 년이라고 한다. 허블 망원경이 본 가장 먼 거리는 132억 광년 떨어져 있는 `UDFj-39546284'로 이름 붙여진 은하다. 우리가 보는 이 은하의 모습은 지금의 모습이 아니다. 132억 년 전의 모습이다. 우주가 탄생한 지 5억 년밖에 지나지 않은, `태고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정말 까마득한 옛날의 모습을 `지금'보고 있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유물이나 문헌을 통해서 과거를 간접적으로 보지만, 천문학자들은 망원경을 통해서 과거를 직접적으로 보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 까마득한 과거사인 우주 탄생의 신비를 알게 되는 것도 바로 과거를 볼 수 있는 망원경 덕분이다. 그렇다고 천문학자들이 망원경만으로 과거를 보는 것은 아니다. 고인류학자들이 유물을 관찰하여 그 연대와 시대상을 알듯이 천문학자들도 망원경으로 별이 얼마나 멀리 있고, 어떤 상태인지를 알아낸다. 그 별의 나이며, 질량이며, 온도며, 심지어 앞으로 얼마나 살 것이지도 알아낸다. 별에서 나오는 희미한 빛 한줄기로 말이다.

천문학자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서 그렇게 고심하는 것은 우주의 역사를 알기 위함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이 과거를 아는 것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과거를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재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지혜를 얻기 위함이듯이, 우주의 과거를 탐구하는 것도 과거를 넘어 우주의 미래를 알고자 하는 염원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고 만다. 현재는 지나가고 과거만 남는다. 과거가 없다면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덧없을까?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마는 현재가 아니라 영원히 남는 과거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사랑은 가고 추억은 남는다고 했든가? 현재는 사라지지만 과거는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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