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성인 난계 박연 선생을 찾아서
음악의 성인 난계 박연 선생을 찾아서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7.12.20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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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역사기행
▲ 김명철

무주 덕유산에서 발원한 비단결 고운 강 금강의 물줄기가 북쪽을 향해 영동군을 적시며 옥천으로 들어간다.

세찬 금강의 물줄기가 휘감아 돌아가는 영동산골에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천재적인 음악가 난계 박연 선생의 고향 마을이 있다.

충북 영동군 심천면 구당리 비단결 물길이 쉬어가는 금강 아름다운 그곳에 고구려 왕산악, 신라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추앙받는 난계 선생의 사당 난계사와 묘소가 있다.

박연선생은 고려 우왕 4년(1378년)에 삼사좌윤 박천석의 아들로 태어났다. 영동향교에서 공부하여 28세에 생원이 되었고,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 관습도관제조, 악학별좌, 대제학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난계선생의 셋째 아들이 세조 2년(1456년)에 일어난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선생도 파직되고 고향 마을로 돌아와 살다가 세조 4년(1458년) 3월 23일 8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선생의 생가는 2000년에 복원되었는데 아담한 높이의 담을 두르고, 정면 3칸과 전후퇴가 있는 겹집에 우물마루로 안채와 사랑채를 복원했다. 우진각 지붕의 기와집 생가 옆에는 ㄱ자로 배치된 별채가 있는데, 부엌과 곡식창고가 딸려 있는 외양간과 광, 방 1칸인 초가지붕으로 되어 있다.

난계의 업적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세종이 즉위한 뒤 악학별좌에 임명되어 조율의 정리와 악보 편집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수많은 악기와 악보를 제작하였다는 점이다. 선생으로 인해 조선 초기의 미비한 궁정음악이 정리되었고, 이로 인해 조선 왕조의 국가체제 완비에 큰 공을 세웠다는 점이다.

평소에도 난계선생은 `음악은 하늘의 소리다. 하늘과 땅의 아치를 취하고 음양의 도리를 조화롭게 발휘하는 자연의 소리이기에 음악에는 거짓이 없고, 오직 성실함과(誠), 공경(敬)으로 인간을 감동시킨다. 음악을 바르게 하고 예를 일으키는 것이 정서순화의 지름길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난계는 고려의 어지러운 음악을 청산하고 순결하고 바른 소리로 인심을 순화하는 일에 심혈을 바쳐 편경 제작과 신악보법 작성 등 우리나라 음악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셋째 아들 재우의 단종복위 사건 연루로 그 화가 난계에게 까지 미쳤으나, 선생의 공적을 인정받아 생명만은 보존되어 팔순의 노경으로 혈혈단신 백의로 낙향하였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한 자루의 피리에 의지하며 자신을 달래던 난계는 81세의 일기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난계는 초강서원에 배향되었는데,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폐지되고, 1972년 난계사가 영동 자신의 고향 마을 입구에 세워져서 1976년에 지방기념물 제8호로 지정됐다.

선생의 고향 마을 입구 고당리 금강변에는 난계 박연선생을 기리기 위한 난계사와 국악박물관, 그리고 매주 토요일 영동군난계국악단의 토요상설공연이 펼쳐지는 우리소리관과 영동국악체험촌, 천고각 등 우리 국악을 체험하고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

특별히 천고각의 천고는 선생의 모친이 태몽에서 옥황상제의 명으로 내려온 신령이 내려준 천고를 바탕으로 설치되었는데, 이 천고를 세 번 울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번 주말에는 영동으로 가족 여행을 가보면 좋겠다. 2017년을 보내며 못다 이룬 소원이 있다면 천고를 세 번 울려서 소원을 빌어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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