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장군의 추억
똥장군의 추억
  • 김경순<수필가>
  • 승인 2017.12.19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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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 앞에서
▲ 김경순

몇 번을 그곳을 왔다 갔다 했다. 그리고 몇 주일 후, 나는 용기를 내어 도공의 아내에게 갖고 싶다고 했다. 그분은 한참을 망설이더니 작품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간다면 기분 좋은 일이라며 가져가라고 한다. 그날 이후 똥장군은 우리 집으로 와서 목욕재계하고 제일 좋은 위치에 앉아 호사를 누리고 있다.

마당 한 켠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그 도자기는 몸통은 연한 갈색이다. 똥장군의 모양이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앙증맞게 앉아서 웃고 있는 듯했다. 도공은 몇 년 전 도시에서 “똥장군 도자기 기획전”을 열었다고 했다. 그러데 내가 보고 있던 똥장군은 굽는 과정에서 두 개가 서로 붙는 바람에 한쪽 면에 살짝 흠집이 있다고 했다. 과연 반대편을 들어보니 도자기끼리 붙었던 흔적이 보인다. 그래도 도공은 애착이 갔던지 차마 버리지를 못하고 이곳에다 전시했던 모양이다.

똥장군은 아버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아버지는 언제나 그것을 뒷간에 놓으셨다. 어린아이였던 나는 몸에 닿을까 노심초사하며 볼일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이른 봄이면 아버지는 뒷간에서 인분을 퍼 담아 똥장군을 지게에 지고는 언덕배기를 넘어야만 있던 밭에 뿌리곤 하셨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으로 텃밭에다도 뿌리셨다. 그럴 때면 고약한 냄새가 집안까지 들어와서 며칠을 코를 막고 살아야 했다.

지금처럼 그때는 비료도 없었다. 인분은 귀한 최고의 거름이었다. 그래서 크건 작건 볼일은 집에서 보아야 했다. 그렇게 인분이 뿌려진 밭에는 우리들의 식량인 감자 고구마 배추 등이 심어져 풍성한 먹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농약도 치지 않고, 딱히 비료도 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병충해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하긴 지금처럼 인스턴트 식품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모든 것이 자연식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과일도 그렇고, 야채들도 그때가 더 맛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지금 국적도, 어떻게 지어졌는지도 알 수 없는 농산물로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그럼에도 현대인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자연은 오염으로, 사람은 이름도 알 수 없는 병으로 시달리고 있다. 그러고 보면 풍족한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내가 어릴 때는 꽁보리밥을 먹어도, 나물죽을 먹어도 배부르면 행복했었다. 헌데 지금은 모든 것이 풍족해도 배부르게 먹을 수가 없다. 비만은 현대인의 고질병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농부의 품에서 행복했을 똥장군이 이제는 장식품이 되어 앉아 있다. 추억의 물건이 된 것이다. 그래도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옛날을 이야기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오늘도 수업을 받으러 온 한 아이는 똥장군을 보고 궁금해한다. 어김없이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지금도 우리 아버지는 내 먼 유년의 기억 저편에서 석양의 노을빛에 젖은 똥지게를 지고 힘겹게 걸어가고 계신다고. 오늘처럼 눈이 올 듯 하늘이 무거워진 날이면 아버지가 더욱더 그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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