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없는 우화
날개 없는 우화
  • 안상숲<생거진천휴양림 숲해설가>
  • 승인 2017.12.19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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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안상숲<생거진천휴양림 숲해설가>

겨울 추위가 매섭습니다. 하얗게 눈 덮인 숲을 바라보는 마음이 어쩐지 불안합니다. 곤충을 알고부터 걱정도 팔자가 된 듯합니다. 비가 와도 걱정, 눈이 와도 걱정, 작은 생명이 거친 날씨에 온전히 잘 견딜까 염려하느라 매번 노심초사인 것이지요. 그래도 집이라도 그럴싸하게 갖춘 곤충들을 보면 안심이 됩니다. 바로 도롱이벌레가 그렇지요. 도롱이는 우산이 없던 시절 지푸라기 등으로 만들어 두르던 비옷을 말합니다. 풀집을 만들어 사는 모양이 마치 도롱이를 쓴 것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나뭇가지에 바람벽에 어디든 흔하고 흔하게 붙어 있는 것이 도롱이벌레입니다.

절지동물문 곤충강 나비목 주머니나방과. 이래 봬도 나비목의 곤충입니다. 분류학상 나비목에 속한 곤충들은 애벌레 시절 거미줄만큼이나 튼튼한 명주실을 잦을 수 있습니다. 그 명주실로 집을 짓기도 하고 거미처럼 바람을 이용해 이동하기도 하지요. 명주실로 딱 제 몸만 한 집을 짓고 주변의 나뭇잎 등을 붙여 위장하는 도롱이벌레는 먹이를 먹을 때를 빼고는 평생 그 도롱이 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아니 도롱이벌레 수컷은 우화하여 성체가 되는 순간, 알에서부터 애벌레 시절 살았던 도롱이 밖으로 그제야 나올 수 있습니다. 날개를 펼치면서부터 벌레라는 말을 떼고 도롱이나방이라는 근사한 이름도 얻게 됩니다. 그러니 도롱이벌레 수컷에게 도롱이는 안전한 은신처이자 비약을 준비하는 고마운 집이지요.

그러나 암컷은 번데기를 찢는 우화의 과정을 똑같이 거치면서도 날개를 갖지 못합니다. 평생을 도롱이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더 이상 날개가 필요하지 않게 되어 퇴화해버렸답니다. 게다가 움직일 필요도 없게 되어서 다리마저 퇴화시켜 버렸지요. 도롱이벌레 암컷은 결국 날개를 갖지 못하니 벌레라는 이름으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날개 없는 우화를 마친 암컷 도롱이벌레는 오로지 번식만을 위해 움직입니다. 페로몬을 뿜어 도롱이나방이 된 수컷을 불러들이지만 그들의 짝짓기는 난감합니다. 암컷의 생식기는 아주 깊은 곳에 있고 수컷이 자신의 생식기를 그곳까지 뻗어 짝짓기에 성공하는 일은 만만치 않습니다. 수컷은 자기의 배 마디를 두 배로 홀쭉하게 늘여 암컷의 좁은 도롱이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겨우 짝짓기를 마친 수컷은 기진하여 바로 죽고 맙니다. 암컷도 3000개가 넘는 알을 낳느라 몸의 진을 다 쏟고는 곧이어 죽습니다. 죽어서야 겨우 도롱이 밖으로 나온답니다.

날개를 달고 비약을 했던 수컷의 삶이라고 그리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평생을 도롱이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알을 낳고 죽어버리고 마는 도롱이벌레 암컷의 삶은 조금 서글프기도 합니다. 애초 암컷에게도 날개란 결국 돋아나는 것이어서 알을 낳고 종을 남긴 뒤에는 날아오를 수 있어야 했지 않았을까 해서 말이에요. 기왕 있는 날개와 다리를 퇴화시키는 진화를 했다는 게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워서 말이에요.

진화의 방향이 늘 좋은 곳을 향하는 건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살기에 좀 더 좋은 방향의 진화가 아니라면, 도롱이벌레 부부가 끝까지 지키려는 건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이 날개까지 포기하며 남기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삶이 그렇게나 비장한 것이 마음 아픕니다.

자연을 이해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아무래도 제게는 아직 무리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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