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살만한 세상
그래도 살만한 세상
  • 김금란 기자
  • 승인 2017.12.19 1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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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 김금란 부장(취재3팀)

서민의 삶은 늘 팍팍했다. 허리 한번 제대로 펴본 적 없고, 친구에게 한턱쏘겠다며 허세를 부릴 만큼 지갑이 두툼해 본 적도 없다. 세밑이 더욱 쓸쓸하고 힘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적폐청산을 외치며 취임한 새 대통령이 국정을 맡았다고 서민의 삶이 달라졌을까?

여전히 청년들은 최저 시급에서 허덕인다. 졸업을 앞둔 대학생들은 안정된 삶을 찾기 위해 불나방처럼 신림동과 노량진을 서성인다.

정치인들은 늘 없는 사람 편에 서겠다며 선거 때면 고개를 숙이지만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나면 있는 사람의 말만 듣는다.

그나마 서민을 미소 짓게 하고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고 느끼게 하는 것은 얼굴 없는 천사들이 있어서다. 얼굴 없는 천사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일단 말이 없다. 또한 드러내지 않는다. 언론에 등장하는 것도 반기지 않는다.

제천시의 얼굴 없는 천사는 올해도 어김없이 다녀갔다. 12월이면 찾아오는 얼굴없는 천사의 발걸음은 올해로 15년째다. 그는 12월 15일을 전후해 매년 제천시청 사회복지과를 방문해 백색 봉투만 건네고 떠난다. 올해도 봉투 안에는 `오늘도 많이 춥네요. 연탄이 필요한 이웃에게 부탁드립니다'라는 짧은 메모와 함께 1300만원 상당의 연탄 2만장 보관증이 들어 있었다.

제천시의 얼굴 없는 천사의 기부활동 정도면 장관상을 열두 번 타고도 남는다. 하지만 제천 천사의 이름 석 자를 아는 사람이 없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 안달이 난 정치인이나 기관장들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아궁이 헤집듯 SNS에 게시해 `좋아요'숫자에 도취해 있는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잘못된 정책에도 고개를 숙이는 법이 없고, 잘못된 행동에도 수긍할 줄 모르는 기관장들이 떡하고 버티고 있으니 서민의 삶엔 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한파가 몰아친 지난 11일 중학생 3명이 등굣길에 시장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할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패딩 점퍼를 벗어준 일이 세간의 화제가 됐다. 한 명은 무릎을 꿇고 앉아 할아버지의 상체를 세워 자신의 무릎에 몸을 기대도록 했다. 또 한 명은 패딩 점퍼를 벗어 할아버지의 몸을 덮었고, 다른 한 명은 짐을 챙겨들었다. 이들은 할아버지를 업고 비탈길을 걸어 집까지 모셔다 드렸다. 수많은 사람이 지나갔고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 기말고사를 치러야 했던 학생들은 외면하지 않았다. 사연을 전해 들은 학생들의 부모는 질책보다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하고 자랑스러워했다. 할아버지를 껴안았던 학생은 “그 상황에서도 쳐다만 보고 지나치는 어른들을 보고 왜 안 도와주는 건지 이상했다”고 의아해했다.

이들에게는 국회의원상이 수여될 예정이지만 학생들은 상보다는 “할아버지가 걱정됐다”는 말로 식지 않은 세상인심을 느끼게 했다. 패딩 열풍에 휩싸여 수십만 원 짜리 패딩을 사달라고 조르는 청소년들 사이에 입던 패딩을 벗어준 학생들의 존재감은 훨씬 컸다.

한 때 도내 대학교에도 쌀, 라면 등 생필품을 넣은 장독을 비치해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언제든 배를 채우도록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배고픈 시절을 경험했던 교직원들은 공감했지만 젊은 세대에겐 낯선 문화였는지 모른다.

내년 선거를 겨냥해 시혜하듯 기부하고 얼굴 도장 찍는 이들보다 서민들은 얼굴없는 천사의 등장을 기다린다.

존재감은 없지만 마음 한켠 온기를 전해주는 얼굴 없는 천사들이 있어 서민들은 오늘도 힘을 내는 것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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