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보내는 길목에서
한 해를 보내는 길목에서
  • 백인혁<원불교 충북교구장>
  • 승인 2017.12.18 19: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유의 숲
▲ 백인혁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간 아버지 농사일을 도운 적이 있었습니다. 농사일 중에서도 힘이 들었던 일은 가을이면 볏단을 지게로 짊어져다가 집까지 운반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논은 집에서 멀리 있어 볏단을 지고 집까지 한 번에 올 수가 없어 몇 번씩 쉬어야 했습니다.

그 일을 하면서 터득한 지혜는 힘이 들면 쉬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쉬어야 할 곳에서 쉬지 않고 욕심을 부리다 보면 볏단을 쏟아 더 힘이 들어야 했으니까요. 쉼 없이 돌아가는 자연조차도 계속 돌아가는 것 같아도 멈추었다가 다시 돌아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순환하는 이치를 우리는 초목에서 쉽게 볼 수가 있습니다. 봄에는 새잎을 피우고 여름엔 왕성하게 자라다가 가을이면 열매를 맺고 동절기를 맞으면 쉽니다.

인생도 계속 앞으로 뻗어만 갈 수는 없기에 쉬었다가 다시 나아갑니다. 하루를 살아갈 때도 때맞춰 쉬면서 새로운 힘을 보충해 삶을 지속해 가지요. 이제 자연의 휴식기 겨울을 맞아 눈과 추위 속에 잘 쉬면서 내년을 준비해야 하는 것은 도를 알고 사는 도인이나 진리를 알고 사는 성직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없고 주린 배를 채울 음식이 없는 우리 이웃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좋은 일을 한다고 어려운 이웃에게 동정을 베풀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와 같은 휴식 시간을 갖게 하고 그간의 삶을 반성하며 새로운 힘을 충전할 기회를 주려고 한 적이 있었는지 말입니다.

우리는 일하다 지치면 쉬었다가 하는 자연현상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순간순간 일어나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과로와 스트레스가 넘치는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지 성찰해 볼 일입니다. 삶의 리듬을 유지하면서 정성을 들여 이룬 성공이라야 나도 이롭고 옆에서 응원한 사람들도 편안할 것입니다.

제가 살던 시골 마을에는 사랑방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언제나 따뜻하게 불을 지펴놓고 아무나 쉴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낯선 외지인이 마을을 방문해도 쉬어갈 수도 있고 하룻밤을 유숙하다 갈 수도 있는 곳이었습니다.

요즘은 그런 사랑방은 없어졌지요. 경로당이 곳곳에 있어 사랑방을 대신한다고는 해도 거기는 주로 노인들이 가는 곳이지 그 옛날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하지는 않습니다.

돈이 없어도 아는 사람이 없어도 이 추운 겨울날 누구나 쉽게 들어가 언 손발을 녹이고 마음을 덥힐 수 있는 옛날 사랑방 문화가 그립습니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삶 속에서 스스로 낯선 문화를 만드는 우리가 아니라 좀 더 따뜻하고 정이 깃든 문화를 만들어갔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세대만이 아니라 우리의 뒤를 잇는 후손들까지도 누구나 다 살기 좋은 세상, 살맛 나는 세상으로 말입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인생의 수레바퀴를 같이 굴러 갈 수 있다면 행복할 것입니다.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같이 일어나고 같이 즐기며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이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더 가졌다는 것이나 더 잘 안다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참으로 소중한 것이 되겠지요.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움직이고 쉬기를 반복하거나 드러냈다 감추기를 반복하며 돌아갈 뿐이지 우리가 일생을 걸고 구하려는 지위나 명예나 권세 등에는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올해도 그런 것들에 정신이 팔려 지내왔다면 지금부터라도 잠시 멈추고서 쉴 곳이 없어 고통받는 사람은 없는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은 없는지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살펴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한 해를 정리해 보시라고 권해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