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개혁은 대통령에 달렸다
국정원 개혁은 대통령에 달렸다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7.12.17 1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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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 권혁두 국장

존 에드거 후버. 48년간 미국 FBI(연방수사국) 국장을 지내며 대통령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렸던 인물이다. 무려 8명의 대통령이 그의 재임기를 거쳤다. 그들 대부분은 후버의 오만한 언행과 월권에 신물을 냈지만 누구도 인사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는 77세 때 죽음을 맞고서야 자리에서 물러났다. 닉슨 대통령이 재임 중 보좌관과 나눈 대화에서 후버의 파워가 드러난다. 녹취록에서 닉슨은 후버를 어떻게 해서든 물러나게 해야 한다며 이런저런 방안을 궁리하지만, 결국 포기하고 만다. 그의 마지막 말이 이렇다. “막판에 몰리면 나까지 끌어안고 자폭할 인간이야”.

후버의 절대권력은 대상을 가리지 않은 무차별적이고 전방위적인 사찰에서 비롯됐다. 그의 부하들은 미행과 도청을 통해 정재계 유력자들의 내밀한 사생활을 파고들었고, 여자관계 같은 지저분한 정보들을 수집했다. 자신의 권력 유지에 방해되는 사람을 이 정보로 협박했고 치명타를 안기기도 했다.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성 스캔들을 폭로한 사례는 유명하다.

케네디를 비롯해 그를 자르고 싶었던 대통령이 여럿 있었지만,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그가 물어다 주는 정보의 달콤함을 떨칠 수 없었고, 다른 하나는 그가 어떤 정보를 쥐고 있을 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1972년 후버가 자택에서 숨졌을 때 가장 먼저 들이닥쳐 집안을 샅샅이 훑은 사람들이 백악관 팀이었다. 후버는 국가가 두려워하는 사내가 돼버렸던 것이다.

후버는 의회도 장악해 나갔다. 첫 타깃은 정부 예산을 관장하는 하원 세출위원회였다. 60년대 후반 세출위원장을 지낸 존 루니 의원은 후버의 회유에 넘어가 FBI 예산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FBI가 예산 증액의 근거로 날조된 통계자료를 의회에 제시해 문제가 됐지만 루니는 귀를 닫았다. 루니가 세출위원장에 재임한 수년간 FBI 예산은 한 푼도 깎이지 않았다.

후버는 루니에게 대가를 지불했다. 루니 의원이 마피아와 밀착해 10만달러의 뇌물까지 받았다는 범죄 보고를 받았으나 묵살했다. 루니가 지역구에서 상대할 정적에 대한 정보도 수시로 제공했다. 1970년 선거에서 루니는 열세에 놓였으나 FBI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했다. 후버는 상대후보의 케케묵은 위법행위들을 캐내 루니에게 제공하고 공격도록 했다.

최경환 자유한국당 의원이 국가정보원으로부터 특수활동비 1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될 처지에 놓였다. 정부와 산하 기관의 예산을 좌지우지하던 기재부 장관 시절 이 돈을 챙긴 혐의를 받는다. 당시 국정원은 야당 의원들이 특활비를 문제 삼으며 예산 삭감을 주장하고 나서 난감한 상태였다.

반세기 전 미국에서 벌어졌던 시대착오적 행태가 대한민국에서 재현되는 모습이다. 정보기관이 예산 확보를 위해 정치인과 관료를 매수하고, 댓글 달기 같은 치졸한 방식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작태는 후진국에서도 보기 어려운 부끄러운 일이다. 민주주의를 건강한 체질로 유지하려면 권력의 적절한 분산과 상호 견제가 유지돼야 한다. 후버의 FBI가 헌법과 국가 시스템을 망가트린 괴물이 된 것은 백악관과 의회가 FBI를 견제하고 통제하는 대신 담합을 선택한 탓이 크다. 권력과 권력의 야합은 부패와 독재를 낳고, 종국에는 헌정 유린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간판 교체를 포함해 국가정보원에 대한 다양한 개혁안이 쏟아지고 있다. 대공수사권을 넘기고 해외와 북한 정보만 수집하도록 하는 법 개정안이 나왔다. 국정원 특활비에 대해서도 비공개로 예·결산 심사를 하자는 방안이 제기되고 있다. 대통령도 국정원의 국내정치 개입을 금지하고 보고도 받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많은 국민은 미덥잖다는 반응이다. 5공 이후 들어선 정권마다 호언장담했던 것이 국정원(안전기획부) 개혁이었다. 그러나 정치공작은 여전하고 청와대에 뒷돈까지 대는 정권 친위대 역할도 떨치지 못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이유는 하나다. 대통령이 유혹을 떨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정원은 국가안보를 당면업무로 삼는 특수성으로 인해 무한대의 권한을 부여받은 기관이다. 그동안 측근을 수장에 앉히고 국정원의 특수 업무를 자신의 권력강화에 남용한 혐의에서 자유로운 대통령은 없었다고 본다. 국정원 개혁의 성패는 제도가 아니라 오로지 대통령의 실천에 달렸다. 당장 내·후년 지방선거와 총선을 앞두고 있다. 판세가 불리해지면 정권 내부에서 국정원에 대한 그릇된 미련이 꿈틀거릴 수도 있다. 개혁적 제도들을 흔들림 없이 지켜줄 대통령만이 국정원 환골탈태를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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