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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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2.09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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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는 어느 교사의 퇴임
김 병 우 <논설위원, 충청북도교육위원>

교육계의 2월. 소임을 다한 원로교원들에겐 '퇴임의 계절'이기도 하다.

퇴임. 새길수록 묘한 의미가 짚어지는 말이다. 40대초, 대학동기의 명퇴 소식에 '깜짝'싶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여태껏 삶의 오르막을 허위허위 치닫고 있다고 여겨왔는데, 또래는 벌써 생을 정리하는 수순으로 든다는 것인가 싶어 '살짝' 충격으로 여겨졌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새로운 도전이라며 의욕을 보였고, 이후 역시 건강하게 활기차게 중년을 가꾸어가고 있는 것을 본다.

필자도 교직은 떠났지만 '교육동지'들의 퇴임은 남의 일일 수 없다. 특히 올해는 여기저기 들리는 퇴임 소식들에 더욱 마음이 뒤숭숭하다. 특히, 그간 많이 의지하던 한 선배의 명퇴 소식은 애석함과 아쉬움을 더한다.

그는 '천상교사'였다. 필자가 30대 초반에 '제대로 된 교사' 한 번 되어보자고 교육운동·교사운동을 시작하던 때, 거의 띠동갑 연상인 그를 만났다. 그는 40대 초반이었지만, 우리들에겐 하늘같은 어른이었다. 잔잔한 표정과 나직한 말투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고 남 앞에 잘 나서지 않는 스타일도 여전하지만, 누군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꼭 그가 있었다. 매사 서툰 우리에게는 버거운 일마다 만만하게 떠넘길 맏형 같은 존재이면서 무슨 일이든 감당해주는 든든한 언덕이기도 했다.

진광불휘(眞光不煇). 이 말을 그대로 몸으로 보이는 이가 그였다. '참빛은 번쩍거리지 않는다.' 좋은 물에 향이 없듯이(眞水無香) 진정한 빛은 결코 휘황하지 않음을 그는 은은히 보여주었다. 언제나 뒤꼍에 조용히 있음에도 그의 존재가 은연중 우러나왔고, 그가 있는 자리는 알게 모르게 그로 하여 넉넉했다.

그가 충북교사협의회의 초대회장과 충북글쓰기회 회장을 맡는 등, 1980년대 충북교육운동의 주역이었다는 이력은 오히려 그의 본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 '분신정국'이라 불리던 민자당 말기(90년대초), 최루탄과 주먹돌이 난무하는 가두에서 핸드마이크를 잡고 시국선언을 부르짖던 그의 모습은 그의 죽마지우들조차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그의 진면목은 도리어 그의 둘레에 어리는 '아우라'에 있다. 충북 전교조의 최고령 해직교사로서 한겨레신문 배달로 생계를 꾸려가던 모습, 동심 천진한 그의 시편들, 자동차 홍수 속에서도 꿋꿋한 자전거 통근, 그런 면면들에 은은히 배어 있다.

그의 대학 동기들이 속속 승진해 대교장단 반열에 들고, 더러는 교육위원·교위의장까지 오르는 동안에도, 그는 오직 소박한 평교사의 외길에 여념이 없었다. 오랜만에 복귀한 교단에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50대를 홀딱, 밤새워 학습자료를 만들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짜고, 산수화를 배우고, 국악기를 익히며, 코흘리개들을 손수 거두어왔다.

그런 그가 정년을 1년 이상 남기고 천직을 조기 은퇴한다는 것이다. 마라톤 풀코스 주파가 거뜬한 체력에, 젊은 교사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학구열에, 미상불 '밀려서' 그럴리도 없는 터인데. 분명한 것은 그의 퇴임도 새 출발일 것이라는 점이다. 벌써 퇴임 후 과제로 '지역문화' 사이트를 개설해 놓았다고 한다.

이번 설을 지나면 곧바로 후배들 손으로 조촐한 퇴임식이 차려질 것이다. 그날 그가 주인공이 되는 '생애 첫 무대'가 펼쳐지면 그간 갈고닦은 그의 산수화와 시화, 또 자신과 후배들의 국악 연주가 어우러지는 가운데, 자기 삶의 가장 빛나는 시절들을 '시대와의 불화'에 바친 '문제교사'들이 줄줄이 모여들 것이다. 그리고 노익장의 '새로운 앞장'을 기리며 그 바통을 이어받으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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