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김지영
우리들의 김지영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7.12.12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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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깜깜해진 하늘 위로 공평한 선물처럼 드문드문 일정하게 눈이 내렸고, 바람이 한 번씩 두서없이 불면 눈송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단숨에 읽었다.

조선의 실학자 이덕무는 <영처잡고>를 통해 “소설에는 세 가지 의혹이 있으니, 헛것을 내세우고 빈 것을 천착하며 귀신을 논하고 꿈을 말하여 짓는 자가 한 가지 의혹이요. 허황된 것을 부추기고 비루한 것을 고취시킨 것을 평한 자가 두 번째 의혹이요,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경전을 등한시하여 본 자가 세 번째 의혹이다”라고 말했다.

책을 사자마자 단숨에 읽고 난 후 실학자가 주장하는 소설의 폐단이 그저 아이러니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1982년 태어난 이 땅의 여자 이름 가운데 김지영이 가장 많았다는 실체적 진실과, 심상치 않은 차별이 고스란히 존재하는 대한민국에서의 여성은 여전히 소설적 상상만큼 넉넉하지 않은 현실.

이 땅의 절반이 절대로 균형적이고 또 공평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베풀어야만 하는, 말하자면 `선물'의 무한제공자로 살아야 하는 억울함이 해소되는 날이 기어이 오기는 올 것인가.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이토록 지독한 여성차별을 내내 탄식한다. 반드시 해야 할 이야기는 `김지영'이 아닌 환생 또는 변신하는 타자의 입을 빌려야 하고, 정작 자신은 머릿속 생각으로만 맴돌 뿐 스스로의 입을 통해 발설하지 못한다. 그녀는 기어코 정상적인 상태(이런 나의 표현 역시 정상적일 수는 없다)에 온전하게 놓이지 못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비극적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상은 끊임없이 무리 짓고 편을 가르며, 또 울타리를 만들어 스스로를 차별하고 있다. 우리가 일 년 전 촛불을 들어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몸살을 앓고 있을 때만 해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비정규직의 위태로움을 씻어내자는 사회적 합의는 정작 그 대상이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거나 우리 주변의 일로 접근될 때 소스라치게 놀란다. 자본가와 사용자로부터 가해지는 차별의 서러움은 정규직이건 비정규직이건 별다를 것 없는데, 공정한 잣대는 서로에게 절대로 일치되지 않고 결코 허용할 수도 없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에 속속들이 배어 있는 이 땅의 절반에 대한 지독한 편견은 조금 가진 자와 덜 가진 자의 평등에 이르면 도저히 양보할 기색이 없다.

우리 미래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노동조합인 전교조는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 반대를 선언했고, 인천공항공사 역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하고 있다. 심지어 정규직을 원하는 비정규직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정규직이 차지하는 사업체가 나타나는 등 배려와 관용은 찾아볼 수 없는 독선도 마다하지 않는다. 공존은 애시 당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인가.

나아질 수 없는 여성의 처지도 딱하고, 2000년대 초 이미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겨버린 이 땅의 비정규직의 처지도 참담하다. 결국 노동자의 적은 노동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러한 차별은 끝내 극복할 수 없는 것인가.

울컥한 심정에 떠오르는 노래 한 곡이 처연하다.

옛날 옛적에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왕이 있었어요./ 그의 나라에는 여전히 눈으로 덮여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왕은 사악하고 야비했기 때문에 봄이 오지를 않았어요./(중략) 여행자가 문 앞에서 오로지 하룻밤 식량과 재워달라고 도움을 구했을 때/ 왕은 하인을 시켜 그녀를 쫓아내 버렸어요./ 4월의 눈동자를 지닌 소녀를 말이에요./ (중략)그녀는 숲 속에 있는 초라한 사람이 사는 집의 빛을 찾게 될 때까지/ 밤이 새도록 말을 타고 달렸어요./ 그는 그녀를 집안 난로 곁으로 데려왔으나 그녀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녀를 고이 묻어 주었어요. 몹시 추운 날. 내리는 눈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누구에게나 선물이어야 할, 결국 우리는 모두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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