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항을 위하여
출항을 위하여
  • 최명임<수필가>
  • 승인 2017.12.12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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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최명임

12월은 아쉽고 착잡하나 매듭달이요, 누군가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해, 마지막 달이다. 그런 모든 이에게 새달은 신신한 얼굴로 희망을 보쌈해 찾아온다. 그래서 12월은 막달의 임부처럼 기쁨과 설렘의 달이기도 하다.

감사하다. 조금 더 노력할걸, 좀 더 많이 사랑할 걸, 그때 그 일을 시작했더라면 하고 후회도 남지만, 이만큼의 진보도 감사하다. 쌀독에 쌀이 비는 일이 없었고, 변함없는 일상이었으나 안녕하고, 짬을 내어 글을 쓸 여력이 있었다. 그만하면 족하다. 소박한 밥상 앞에서도 마음이 한가로우니 나이는 허투루 쌓여 가는 것이 아닌가 보다. 그보다는 내가 올린 기도 덕분이 아닐까 하고 곰곰 생각해본다.

하루를 살아내는 일이 조마조마하다. 더러는 신열에 가슴앓이를 하고 막막한 지경에 빠지는 날도 있다. 한 해를 살아 내는 버거움이야 말해 무엇하리. 전쟁터로 나서는 병사의 간절함으로 하루하루 시작해야 하거늘 타성에 젖어 자주 기도를 잊어버린다. 그래서 새해 첫날 첫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의식을 치른다. 그 첫날을 바탕에 두고 `나'의 일 년은 물 흐르듯 갈 것이라고 최면을 걸어놓고 새해를 시작한다. 내면에 깔린 원초적 두려움이 완전히 해소될 수는 없겠지만 저항할 수 없는 절대자 앞에 경외심으로 의식을 치르고 나면 안심이 된다.

기도는 인간의 오만이 바벨탑에서 내려와 가장 낮은 자세로 임하는 겸손의 언어이다. 연말 우체부의 발등에 불 떨어진 임무처럼 첫날 밀려드는 만인의 기도로 하느님은 도리질하시지는 않을는지.

곧 새해 맞을 준비를 해야겠다. 첫날 바치는 내 기도는 어부의 해신제처럼 한해살이를 위한 의식이다. 해신제는 어부의 풍어와 무사 귀환을 바라는 제 의식이다. 어부의 바다는 미지의 세계, 두려운 존재이다. 바다가 성을 내고 태풍이 몰아치면 도중하차할 수 없는 극한의 공간에서 죽음과 같은 고통을 맛보게 될지도 모른다. 출항에 대한 설렘과 기대가 있지만 바탕엔 그 두려움이 진하게 깔려있다. 해신제는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고 희망을 얻어가는 어부의 간절한 기도이다.

나도 어부의 마음으로 해신제를 지낸다. 한 해 마지막 날에 마음을 가다듬고 편지를 쓴다. `주여, 새해에는 부디 이렇게 해주소서.'라는 나의 기도이다.

기도가 담긴 편지를 앞에 놓고 그 기도를 위한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첫날 첫 시간에 편지를 땅에 묻는다. 절절한 소망이 있는 해는 `더도 말고 그 바람만 이루어 주십시오.'라고 일방적 요구를 한다. 내 기도를 우체통에 넣어도, 땅에 묻어도, 성상 앞에 바쳐도 아니 가슴만 절절해도 그분은 모르실 리 없지만, 이 의식을 즐긴다. 그런 내 편지는 중앙공원 소나무 밑, 무심천 자락과 양성산 허리, 부모산에도 있다. 기도에 무심하실 때는 원망이 들기도 하였지만, 이제는 어떤 답장을 받더라도 순응하며 살아가려 한다.

첫 편지는 나의 빈 쌀독이 차고 넘치게 해달라는 절절한 기도였다. 절망이 바닥을 치고 오르면 사람도 따라 철이 드는지 지금 내 기도는 소박하다.

출항 전 해신제는 가장 기도다운 기도이다. 믿고 떠난 어부는 지금쯤 한바다를 누비고 있겠지. 무사 귀환을 감사드리며 나도 새해 첫날 의식을 치르고 출항을 서둘러야겠다.

이번 편지에도 부디 지난해처럼 물 흐르듯 그렇게 흘러가길 원한다고 써서 부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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