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나는 삶
향기나는 삶
  • 안희자<수필가>
  • 승인 2017.12.1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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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안희자

올해도 어김없이 내 앞으로 택배가 도착했다. 멀리 부산으로부터 날아온 것이다. 내겐 보약 같은 선물, 시고모님께서 손수 담근 김장김치다. 정을 듬뿍 담은 김치를 받을 때면 가슴 뭉클해진다. 곰곰이 생각해도 이렇게 귀한 선물을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해마다 연례행사로 이어진다. 친정엄마 떠나신 후로 이십 년을 받아왔으니 염치가 없다. 직접 농사지은 것도 아니고, 팔순의 연세에 혼자 김장하는 일은 힘에 부칠 것이다. 이제 그만 손 놓으라고 간청을 해도 당신은 여전히 손사래를 치신다. 그분의 넘치는 사랑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

거실에 박스를 펼치고 김치를 꺼내놓았다. 박스에 삐뚤 빼뚤 써 놓은`김치'란 글자에 목울대가 뜨겁다. 혹여 터질세라 몇 겹으로 싸맨 비닐봉지를 양파껍질 까듯 벗기면 저마다 몸통을 드러낸다. 빨갛게 버무린 배추김치며 잘 생긴 총각김치, 국물 자박자박한 백김치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이내 곰삭은 젓갈 냄새가 물씬 풍기고, 등 굽은 고모님 모습이 물결 치듯 어른거린다. 코끝이 맵다. 양념에 흠뻑 버무려진 김치를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김치를 쭉쭉 찢어 금세 밥 한 공기 뚝딱 해치웠다. 한두 달쯤 지나면 온갖 양념이 서로 어우러져 잘 발효될 것이다. 겨울 김장이 향이 깊듯 바로 고모님이 그런 향기를 지닌 분이 아닌가 싶다.

고모님의 삶은 험난하였다. 궁핍한 살림에 직장 다니며 자식들 키우느라 애면글면하셨다. 모질게도 어느 해 겨울, 당신의 가정에 불행이 닥쳐왔다. 장성한 둘째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에 당신은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를 보전하셨다. 그날 장례의식을 지켜보면서 난 가슴이 아리도록 아팠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아픔을 껴안고 몸부림치다 암 투병으로 이어지면서 당신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찬바람 부는 겨울이면 먼저 간 자식이 애타게 그립다는 당신. 잊어보려고, 평소보다 더 많은 김장을 몸이 부서지도록 하셨다는 고모님. 절인 배추가 숨이 죽듯 애끊는 슬픔을 다스리기 위해 기꺼이 이웃들과 나누는 삶을 선택하셨단다.

김치냉장고에 김치를 켜켜이 넣는다. 추위가 몰아쳐도 마음은 헛헛하지 않을 것 같다. 겨우내 감사한 마음으로 꺼내 먹으리라. 얼큰한 김치찌개 끓여 먹고, 찐 고구마와 백김치 먹으며 이 겨울을 보낼 것이다. 당신의 수고로움이 죄스러워 단 한 포기도 버릴 수가 없다. 거저먹어 본 적도 없다.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돈으로 환산할 수 없지만 나는 생신 날을 핑계로 빚을 갚는다. 욕심내지 않았다. 먹을 만큼 저장하고 지인과 어려운 이웃들과 나눠 먹었다. 얻어먹는 기쁨보다 나눠 먹었을 때의 기쁨이 더 크다는 것도. 내가 타인과 나누고자 하는 마음을 지닐 수 있는 것도 그분의 삶에서 배운 것이다.

김치가 발효되기까지는 소금에 절이고 갖은 양념에 버무려 숙성하는 과정을 겪어야만 제 맛을 낼 수 있다. 사람도 그렇다. 나이 들면 부패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이 들수록 발효되는 사람이 있다. 아픈 시간을 견딘 사람은 그만의 진한 향기가 배어난다는 것을 고모님의 삶을 보면서 알았다. 나는 지금 잘 숙성하고 있는 걸까.

오늘은 김치 한 포기 썰어 돼지고기 보쌈으로 저녁을 차렸다. 입 안 가득 향기가 퍼진다. 아직도 내겐 꽃보다 진한 향기로 남아 있는 당신. 겨울이면 잊을 수 없는 사람의 향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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