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임금 섬긴 무관 괴산군수 유사
죽음으로 임금 섬긴 무관 괴산군수 유사
  • 김홍숙<괴산군문화해설사>
  • 승인 2017.12.10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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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김홍숙

유사(柳泗 1599~1636)는 조선 중기 무신으로 자는 성부(聖夫)이고 본관은 문화이며 괴산군수를 역임하였다.

고려 개국공신 삼중대광, 벽상공신 대승공 차달(車達)의 25세손이고 조선 태종조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충경공 류 양의 12세손이며 수통정 류광록의 맏아들로 충남 서산시 부석면 가사리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밀양 박씨이고 후배(后配)는 평양조씨 이다. 어려서부터 용맹하고 강직했으며 병서(兵書)에 통달함은 물론 용모가 단정하였다. 자라면서 행실이 바르고 예로서 몸을 닦았으며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며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다.

1619년에 20세의 젊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 병절교위 군자감을 역임하였고 1632년 괴산군수 겸 선전관 오위도총부 부총관이 되었다.

괴산에서 목민관으로 있을 때 청렴하고 자애롭게 백성을 사랑하며 가족은 물론 백성을 세세히 살피어 굶주림이 없도록 하여 괴산 백성들은 부모같이 섬기고 따랐다고 한다.

1636년(인조14) 괴산군수로 재직하던 중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남한산성에 피해있는 인조임금을 구하기 위해 괴산군민으로 구성된 근왕병을 이끌고 경기도 광주까지 나아가 “필사즉생(必死則生)” 정신으로 오직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하였다. 이때 청나라 오랑캐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휘하 병사를 보면서 분을 참지 못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죽음으로 임금을 섬긴다” 는 뜻의 [사군사(死君事)] 세 글자를 혈서로 써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고 한다. 물밀듯이 쳐들어오는 청나라 군사들과 치열한 전투 중 적을 수십 명을 죽이고 적의 시퍼런 칼날에 맞아 순절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부하병사가 투구와 토수만 간신히 거두어 말의 등에 매달고 지금 사당 충절사 위치(서산시 부석면 가사리 254)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그 말 또한 치열한 전투에 굶주림과 피로로 인해 도착하자마자 쓰러져 죽었다.

인조는 그의 순절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슬퍼하며 신하를 보내 조문하게 하였으며 가족을 위로하고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소찬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나라는 전세의 불리로 항복하는 바람에 전망공신(戰亡功臣)에 대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의 논의조차 못 하던 중 1717년 종묘 조정 시 특별히 가상기충하여 이등공신 종2품 가선대부 병조참판(嘉善大夫 兵曺參判)에 증직되고 시호는 충민(忠愍)이며 충신으로 정려(旌閭)되어 충신 정려와 부조지전(不?之典;국가에 큰 공적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영구히 사당에 모시게 하던 특전) 충절사(忠節 祠)사당이 세워졌다.

승정원일기 고종 4년 정묘(1867) 9월 15일에 정려 받았으며 [조선충신 증 가선대부병조참판 오위도총부 부총관 시 충민공 통정대부 행 선전관 겸 괴산군수 류사지문] 이라 명정되었다.

1881년 10월 20일 조정에서 다시 병절교위 훈련원주부 류사 증 종2품 가선대부 병조참판으로 교지(敎旨)를 내렸다.

“무인으로서 가장 영광된 죽음은 마지막 전투에서 적의 탄환에 쓰러져 죽는 무인이 참된 무인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묘소는 서산시 부석면 가사리 산 245번지 검안산에 있으며 묘 앞에 충마묘(忠馬墓)를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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