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이 된다는 것은
배경이 된다는 것은
  • 김경순<수필가>
  • 승인 2017.12.0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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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 김경순

빈들의 낟가리에서 한 무리의 참새 떼가 우루루 떼 지어 날아오른다. 먼 하늘의 기러기들도 서둘러 둥지를 찾아가는 중이다. 계절은 다시 원초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 무성하던 들판의 푸성귀들도 화려하던 시절은 어느새 다 잊고 깊은 동안거에 들어갔다. 겨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안으로 품어 안고 있다. 씨앗이 다시 새 생명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나무가 다시 푸른 잎들과 살 수 있는 꿈을 꿀 수 있도록 뿌리를 보듬어 자신의 넓은 품속에 갈무리해 놓았다. 그러고 보면 겨울은 기꺼이 여타 계절들의 배경이 되어주는 계절임이 틀림없다.

나에게도 그런 오래된 친구들이 있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공부의 매력에 빠져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주고 힘이 되어준 사람들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도 우리는 그 정을 잊지 못해 십 년이 넘도록 모임으로 만나고 있다. 각자 자신의 일터에서 옴나위없이 바쁜 사람들이지만 일 년에 두어 번은 작정을 하고 여행을 간다. 이번 여행지는 순천이었다. 장거리임에도 수다 삼매경에 빠진 여자들에게 거리와 시간은 그리 중요치 않았다. 자주 만나지 못해서인지 이야기보따리를 다들 몇 개씩은 챙겨 온 듯하다. 그동안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의 자리에서 뒤를 돌아보게 되고, 비우는 연습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왠지 겨울과 너무도 닮은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겨울에서 느껴지는 쓸쓸함과 덧없음의 분위기가 아니다. 모든 것을 이해해 주는 넉넉함과 누군가와의 나눔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겨울의 또 다른 모습 말이다. 여행길을 재촉하는 이도 없다. 느릿느릿, 더 많은 것을 보기보다는 순간을 느끼기 위해 열중한다. 오늘,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알기에 우리는 서로에 대한 배려로 그렇게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다.

중간 중간 사진도 찍었다. 다른 이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 영 쑥스러운 사람들에게 셀카봉 보다 나은 것이 없지 싶다. 내가 준비해 간 셀카봉은 우리를 더욱 즐겁게 만들었다. 경치가 좋은 곳에서 사진을 찍을 때면 일행들을 저만치 뒤에 세워 놓고 나를 중심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렇다 보니 다들 자신들은 내 배경일 뿐이라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린다. 멋진 풍경 속에 일행들의 모습을 찍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내 모습만 빠지는 것이 아쉬워 얼굴만 살짝 끼워 넣었다. 하지만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무엇이 중심이 되는가는 정말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에 따라 자연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동양화를 보면 사람은 자연의 일부가 되어 점처럼 작게 그려지곤 했다. 하지만 서양화에는 사람이 중심이 된다. 자연은 사람을 뒷받침해주는 배경일 뿐이다. 그렇다 보니 자연은 사람이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소유물이 되어 버렸다. 알게 모르게 우리 동양인들의 인식에도 어느새 자연을 단지 소유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배경이 된다는 것이 자신을 더 작게 만드는 일도 아닌데 말이다. 밤하늘의 별이 빛날 수 있는 건 깜깜한 하늘이 배경이 되어 주기 때문인 것처럼, 사람도 자신이 빛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배경이 되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을 닮은 사람들, 자신이 빛나기보다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배경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부모님이 그러하고, 저만치 내 뒤에서 하트를 그리며 환하게 웃고 서 있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눈이 올 듯 잿빛 하늘이 아주 낮게 내려앉았다. 셔터를 눌렀다. 이번에는 내가 들어가지 않은 배경이었던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도록 했다. 나도 어느새 누군가의 배경이 되고 있나 보다. 시나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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