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그러나 편안한
불편한 그러나 편안한
  • 김희숙<수필가·원봉초병설유치원 교사>
  • 승인 2017.12.0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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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희숙

어둠의 살갗을 뚫고 달리는 기차에 올라 하루를 더듬어 본다. 밤을 싣고 달리는 기차 안에는 사람들이 고요의 이불을 덮고 눈을 감고 있다. 고개를 돌려 밖을 본다. 까만 창문 위에 지친 또 다른 내가 나를 보고 있다. 눈이 마주친다. 가만히 머리를 쓸어 본다. 그녀도 반대 손으로 머리를 쓸고 있다. 오직 대중교통만을 이용한 불편한, 그러나 일상을 벗어난 마음 편안한 여행이었다. A4와 함께한 하루를 A4용지 접듯 착착 접어서 달리는 기차의 선반 위에 올려놓고 나도 눈을 감는다. 편안함과 불편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하루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하늘을 향해 로켓을 장착하고 있는 것 같은 메타세쿼이아 길, 노란 향기가 날 것 같은 은행나무 길, 자작자작 타는 소리가 난다는 소금 빛 몸통의 자작나무길, 그 나무들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다람쥐들, 곳곳에 붙어 있는 겨울연가 드라마 장면들. A4와 함께 눈에 넣었던 날들의 모습이다. 모임의 이름처럼, 우연인지 필연인지 아니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인지 우리는 네 명이 모두 A형이다. A4의 이번 여행지는 남이섬이다. 새벽 5시 반에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시간을 못 맞출까 봐 그 불안감에 휩싸여, 새벽 3시가 돼서야 겨우 잠에 들었다. 알람 소리에 화들짝 놀라 옷을 입고 현관문을 나섰다. 이번 여행의 콘셉트는 불편이었다. 차를 놓고 오직 대중교통을 이용한 불편한 여행을 하며, 여행의 의미를 찾아오자는 거였다. 오송역에서 가장 가까운 지웰시티에 사는 재실언니 집 주차장에 차를 대고 역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다들 이런 새벽에 처음 진입하는 듯 비몽사몽이었다. 서둘러 역으로 갔다. 기차를 타고 청량리로 가서 다시 영춘선을 타고 가평역에서 배를 탄 후 남이섬에 당도했다.

비가 내리는 남이섬에는 등을 구부린 안개가 몸을 펴고 있었다. 안개와 비가 뒤섞인 섬을 돌았다. 너무 일찍 서둘러서인지, 오후 1시가 되자 남이섬을 섭렵했다. 아점을 먹고 다시 청량리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만석이었다. 한 시간 이십 분을 서서 가야 한다는 사실이 캄캄했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이 층 기차의 E층에 올라 짐 싣는 곳에 몸을 구겨 넣었다. 기차 바닥에 남이섬에서 챙겨온 안내 팸플릿을 깔고 앉아 다리를 쭉 뻗었다. 오랜만에 일상에서 탈출했으니, 일상이 손을 흔들고 있는 청주로 곧장 가고 싶지 않았다. 홍대 근처 소극장에서 연극을 보자는 영주 언니의 말에 우리는 택시를 타고 소극장을 향했다. 그러나 월요일이라 공연이 없다고 했다. 또 다른 소극장을 향해 택시를 탔다. 그곳의 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그냥 청주로 돌아가기는 아쉬웠다. 홍대거리를 떠돌았다. 젊음이 물씬 느껴지는 거리를. 자유로운 길거리 공연을 자유로운 영혼들이 자유롭게 앉아 구경하고 있었다. 우리도 그 틈에 끼어 늙어가는 자유를 잠시 즐겼다. 조신하기만 하던 진희의 얼굴에도 함박웃음이 퍼졌다. 그녀의 몸속에도 자유로운 피가 흐르고 있었던 듯 그래서 그 피가 얼굴로 활짝 피어난 것 같았다.

진희가 어깨를 흔들어 눈을 뜨니 오송의 어둠이 팔을 벌리고 있었다. 불편과 편안함을 곱씹다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역사를 뒤로하고 청주로 향했다. 드디어 도착한 청주의 새벽 공기가 펄럭이며 어서 오라고 등을 토닥였다. 다시 일상이다. 기계와 도구가 널려 있는 편안한, 그러나 나를 돌아볼 여유가 없는 불편한 일상으로 진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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