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겨울 들판을 거닐며
12월, 겨울 들판을 거닐며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7.12.0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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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달력을 넘기며 더딘 12월을 맞는다.

한 때는 나도 달력을 앞당겨 뜯어내며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달랑 한 장만 남아 있는 달력을 보며 세월을 한탄하고 있는 처지가 되어버린 지금, 올 한해가 유난히 새삼스러운 아무래도 12월은 반성하기에 적당한 계절인 듯하다. 지난해 이맘때 우리는 모진 삭풍을 마다하지 않고, 아니 칼바람에 당당하게 맞서며 광장과 거리에 모여 촛불을 들었다. 그 촛불 하나하나는 어쩌다가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도록 모른 척했는가에 대한 반성이었고, 또 어찌하여 이런 대통령을 뽑았는가에 대한 회한이었다.

그리고 촛불은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혁명이 되었고, 마침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쌓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사려 깊은 반성에 이르지 못하거나 아예 반성할 줄 모르는 세력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 나는 이미 여러 차례 한국 현대사의 모든 왜곡과 불편부당함이 반민특위의 해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지 못하고, 또 침략 외세와 결탁했던 지배 세력의 적폐를 여태껏 청산하지 못하고 있음을 반성하지 못하고 있다. 극단적인 경제양극화로 인해 세계 1% 상위그룹의 재산이 나머지 99%의 재산 총액과 같아지는 불평등을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기며 반성할 엄두조차 내지 않고 있다. 지독한 일자리 부족으로 인해 함께 사는 세상을 지옥처럼 여기는 청년들의 탄식을 외면하거나 방치하고 있으며, 심각한 저출산과 가계부채, 그리고 교육 불평등 및 권력과 부의 세습이라는 고질적인 모순을 반성하지 못하고 있다. 사장만 바뀌면 모든 부조리와 불순이 해결될 것으로 여기는 듯한, 그리하여 오랜 기간 동안 정상으로 회복되지 못한 방송의 자기반성 또한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함께 살아가야 할 세상이 마치 정권의 변화에 따라 정치적 보복이라거나 탄압으로 몰아가는 반 질서와 그때 모른 척했던 것들이 앞으로도 얼마든지 모른 척할 수 있다는 기회적 변신을 허용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한 철저한 반성 또한 하지 못하고 있다.

올 한해 나는 또 나를 알거나 모르는 사람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 또는 절망을 안겨 주었는지 여전히 헤아리지 못하고 있고, 가족이거나 친지 혹은 동료와 지인들에게 얼마나 따뜻한 사람이었는지 진솔한 반성에 이르는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12월, 유난한 한파가 기승을 부리는 겨울 한복판에서 새로 걸린 `광화문 글판'이 성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 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허형만. 겨울 들판을 거닐며. 전문>

아무래도 12월은 더 많은 반성으로, 한 달 내내 서성거리는 마음을 가질 일이다. 이제 더 이상 이상한 일은 벌어지지 않는 나라. 생각만 해도 가슴 훈훈해지는 세상 사람들과 즐겁고 행복한 꿈을 같이 나누며 텅 빈 들판을 채우는 넉넉함이 필요하겠다. 찬 바람을 맞아도 청량해지는 겨울. 맨 먼저 내리는 눈이 맨 나중에 내리는 눈을 위해 녹아내려도 아깝지 않을, 깊어지는 촛불 하나 밝히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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