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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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숙<수필가·원봉초병설유치원 교사>
  • 승인 2017.11.3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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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희숙

대련에서 고속 열차로 6시간, 연길에서 4시간을 달려 도착했다. 매표소 앞에 끝없이 늘어선 인파에 섞여 물방울처럼 서 있었다. 익숙한 음악이 귓바퀴를 맴돌았다.

세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연속 재생되는 이루마의 `Kiss The Rain'. 이 광활한 땅에서 만난 내 민족의 피아노 선율에 뿌듯함이 밀려들었다. 매표소 통과 후에도 전용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줄이 사탕이었다.

세 시간을 기다리고 버스로 이 십여 분을 달려 장백폭포에 도착했다. 졸졸 쏟아지는 장백폭포는 생각보다 작았다. 버스를 타고 내려와 승합차로 갈아타고 백두산에 올랐다.

산 아래에서 쏟아지던 비는 산에 오르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개어있었다. 아슬아슬한 커브 길을 달리는 승합차에 짐짝처럼 흔들리며 도착한 천지 근처. 그곳도 이미 사람들로 빽빽했다.

길게 늘어선 개미들의 행렬에 끼어 나도 한 마리 작은 개미가 되었다. 영차영차 산을 올라 드디어 천지에 이르렀다. 아무에게나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도도한 천지가 속살을 파랗게 풀어헤치고 있었다. 몇 번을 오고도 안개 때문에, 혹은 비 때문에 천지를 보지 못하고 가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첫 번째 올라 천지를 본 건 정말로 행운이라고, 동료가 내 귀에 속삭였다. 비록 중국 땅을 통해 올라온 백두산에서 본 천지지만 기쁨이 온몸에 출렁였다. 멍하니 천지의 푸른 물에 눈을 떼어주고 있는데, 산의 관리자인 듯한 커다란 중국인이 다가와 한참 우리를 쳐다봤다. 나는 갑자기 경계심이 생겨 동료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그러자 남자는 웃으며 이쪽은 장백산이고 저쪽은 북한이라고, 서툰 한국말로 띄엄띄엄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곤 사탕 있냐고 물었다. 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지자 사탕이 몇 개 만져졌다. 오랫동안 높은 곳에서 근무하니까, 당이 떨어지고 힘이 빠지나 보다 생각하며 그에게 사탕을 건넸다. 그러나 그는 내게 받은 사탕을 바위 위에 얹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는 시늉을 하더니 기도를 하라 했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난 왜 그 경이로운 풍경을 보고도 기도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왜 그냥 머릿속이 하얘졌을까.

주머니 속 나머지 사탕을 바위에 올리고 눈을 감았다. 작은아이가 꿈틀거렸다. 다니던 학과가 적성에 맞지 않아 복학을 망설이는 아이. 그 아이가 자신의 인생을 잘 설계해서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다음은 큰아이를 위해 기도했다. 사회에 첫발을 딛는 아이가 무사히 시험에 합격해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리고 좋은 사람으로 살게 해 달라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동료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뭐 기도했어?” 나는 “비밀이에요”라고 말하며 빙긋 웃었다. 내가 손을 모아 빌었던 내용을 누군가에게 발설하면 변덕쟁이 천지가 기도를 들어주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새삼 천지에서 돌아본 천륜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본다. 수많은 사람 중에 부모와 자식으로 만나, 가족이라는 단어로 묶여서 살면서 서로 걱정해주고 앞날을 위해 기도해 주는 인연. 그 인연 때문에 기쁘고 그 인연 때문에 아프고 그 인연 때문에 고민하고 그 인연 때문에 행복했다. 뗄 레야 뗄 수 없는 얼굴들이 천지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하늘에 그득하게 펼쳐졌다. 아다지오 보폭으로 흐르던 하루가 비바체 선율로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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