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因緣)
인연(因緣)
  • 임성재<칼럼니스트>
  • 승인 2017.11.3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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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논단
▲ 임성재

나는 요즈음의 나의 생활에 만족한다. 서양 고전을 읽고 사람들과 만나 책의 내용을 함께 토론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은퇴한 이후에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다. 특히 청소년들과 만나 함께 책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행운이다. 

현직에서 물러나 돈벌이가 목적이 아니라 보람을 느끼며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이다.

더욱이 사람들에게 책을 함께 읽자고 권하는 일이라서 남을 대할 때에도 당당하고 떳떳하다. 고등학교 방과후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 혼자만의 충만한 기쁨을 음미하며 드는 생각이다. 이것은 만남의 인연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지금의 나를 이끌어주신 선생님과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퇴직 후에 가끔씩 세종도서관을 갔었다. 뛰어난 시설과 환경 때문에 한 번 다녀온 후로는 푹 빠져서 시간이 될 때마다 찾곤 했다. 그러다가 세종도서관에서 열린 플라톤의 `국가' 강의 시간에서 선생님을 만났다. 그 길로 선생님에게 이끌려 이 길로 들어선 것이다. 

30여 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었다. 당시에는 모두 소중한 인연들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안부를 묻고 서로를 궁금해하며 지내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가끔이라도 만나 밥이라도 먹는 사이의 사람은 극소수다. 그래서 어른들이 퇴직을 하고 나면 그렇게 외로워하셨나 보다. 나도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그렇게 외로운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나의 주변머리로는 더욱 그렇다. 

퇴직 직후 내 전화기에 저장된 이름은 천명이 넘었다. 그런데 직장을 떠나자마자 그중 80퍼센트 정도는 더 이상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일과 관련 없이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머지 20퍼센트 중에서도 생각난다고 아무 때나 불쑥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았다.

일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는 일이 끝나면 그 관계의 고리가 끊어지기 십상이다. 전화기에서 수백 명의 이름을 지웠다. 미련 때문에 지우지 못한 수백 명의 이름이 남아있지만 곧 다 지우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만남엔 부모와 자식 같은 운명적이고 필연적 만남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만남은 우연히 만나 스치고 지나간다. 그런데 그 우연히 만나는 사람 중에서 누구와 어떻게 인연을 맺느냐가 한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게 된다. 따라서 우연을 인연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혜안(慧眼)이 필요하다. 내가 혜안을 갖지 못했다면 옆에서 조언하고 충고해주는 친구가 혜안이 되어줄 수도 있다. 결국 우리의 삶은 나를 이끌어주고 내가 따라 가야할 멘토와 나의 혜안이 되어줄 친구 두 사람만 있어도 크게 빗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의 첫날, 우리의 삶을 한 번 돌아볼 때다. 나에게 멘토는 있는가, 나는 누군가의 멘토가 되고 있는가, 나에게 혜안이 되어줄 친구는 있는가, 나는 누군가의 혜안이 되고 있는가. 삶의 치열한 옷자락, 바쁨이라는 옷들을 잠시 벗어던지고 오롯이 벌거벗은 나를 바라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나를 찾아가는 첫 걸음이다.

나에겐 선생님이 계시고, 혜안을 번뜩이며 끊임없이 충고해주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일까. 어느 때보다 보람찬 한해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감히 행복이라는 말은 꺼내고 싶지 않다. 그리스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가 말했다. `필멸의 인간은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기리지 마시오. 그가 드디어 고통에서 해방되어 삶의 종말에 이르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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