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보다 작은 1, 100을 만드는 1
99보다 작은 1, 100을 만드는 1
  • 권진원<진천 광혜원성당 주임신부>
  • 승인 2017.11.3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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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자의 목소리
▲ 권진원

민주주의 하면 다수결의 원칙을 생각합니다. 다수에 의한, 다수를 위한 이란 외침 아래 행해지는 정당하고도 올바른 선택의 방법으로 취급됩니다. 하지만 간혹 더 많은 이들의 의견이 반드시 옳다는 식으로 소수는 언제나 피해자가 되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항상 다수(多數)가 옳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도 선한 판단인가?'를 물었습니다. 이런 고민을 안고 어느 날 성경 말씀을 묵상하다가 깊은 상념에 빠졌습니다. 루카복음 15장의 말씀이었는데 거기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관해 되찾은 양의 비유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떠올리면 목자가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양 1마리에 대한 그 안타까움과 찾고자 하는 그 간절함 그리고 그 양에 대한 사랑… 마침내 그 양을 찾게 되면 너무나 기쁘고 행복한 나머지 양쪽 어깨에 그 어린 양을 메고 즐겁게 돌아오는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찾은 양에 대해 무리를 벗어나서 목자를 고생시켰기에 화가 날 법한데 전혀 그런 말도 없습니다.

또한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으려면 그래도 99마리를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갔겠지. 가치(價値)로 치면 99와 1이니까 더 많은 수를 위험 속에 방치하거나 버려두지 않았을 거야'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99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라고 말합니다. `목자 없이 광야에 버려진 99마리를 그냥 두다니… 이리와 맹수들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언제 공격당할지 모르는데'

현대인들이 이야기하는 효용의 가치 면에서 99와 1은 비교도 안 됩니다. 경제 시간에 이야기하는 기회비용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떤 것을 얻기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함으로써 잃게 되는 비용인데 이것은 언제나 선택하는 것이 포기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고 큰 것인데 이러한 생각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립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생각으로는 1마리와 99마리이지만 그래서 그 값어치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에게는 각각의 한 마리는 모든 100마리의 양들과 같은 가치입니다. 곧 1마리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100마리 양을 찾아나선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목자의 1마리에 대한 사랑의 크기는 100마리에 대한 그 사랑의 크기와 같습니다. 우리는 1마리에 대한 가격과 99마리에 대한 가격으로 가치를 따지면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에 주저 없이 후자(더 큰 수)를 선택하지만 예수님에게는 그 이윤적 가치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정도이기에 우리와는 다릅니다.

또한 1마리가 없다면 결코 100마리 양이 될 수 없습니다. 완전함이 100이라면 99는 1이 모자란 것입니다. 아무리 큰 99라도 100이 아니라 완전해 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99가 100이 되려면 1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니 이 1은 99와 비교되는 1이 아니라 완전한 100을 만드는 1인 것입니다. 99는 분명 1보다 절대적으로 큰 수이지만 언제나 100보다는 작은 수입니다. 아무리 해도 99에 1이 더해지지 않으면 100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100을 만들어내는 1은 곧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의미가 개수나 수량적 가치로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으로의 하나가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하나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곧 공동체 전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수를 위해 하나가 고통받고 인내하는 것이 낫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때론 하나를 위해서 다수가 희생과 봉사를 하는 때도 필요합니다. 다수보다 적은 수의 소수(혹은 1)가 아니라 전체를 이루는 즉 모두가 되게 하는 소수(99+1=100)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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