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피는 꽃
두 번 피는 꽃
  • 임현택<수필가>
  • 승인 2017.11.29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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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임현택

종이컵 속에 하얀 구름이 피어오른다. 가만 보면 솜사탕 같기도 하고 솜뭉치를 뭉쳐 놓은 것처럼 포근해 보이고, 생크림을 듬뿍 얹어놓은 비엔나커피 같아 커피향이 번지는 것 같다. 너무 하얗게 피어올라`호'불면 금방 허공으로 날아오를 것 같은 하얀 뭉치, 손끝으로 살짝 만져본다.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감싸는 느낌, 자신의 몸을 꼭꼭 옭아매듯 딱딱한 씨앗에 자신을 돌돌 말아 꼭 붙들고는 뾰족한 씨앗 끝으로 일침을 가한다. 하얀 뭉치 속에 꼭꼭 숨어있는 씨앗을 손끝으로 빙빙 돌리며 눈을 감고 또 한 번 느낌을 음미 해 본다. 매혹이다. 목화, 목화 말이다.

늦가을, 보은 오장환문학관으로 가는 내내 가라앉지 않는 들뜬 마음은 자꾸만 거울을 보게 되고 연신 물을 마시며 갈증을 해소한다.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그리던 임선빈문화해설사를 만났다. 강산이 변한다는 시간만큼 세월이 흘렀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하루를 십년 만난 것처럼 우린 서로 손을 맞잡고 한참동안 추억을 회상하며 목화처럼 화사한 웃음꽃을 피웠다.

이곳은 한 참 공사 중이었다. 울밑에 목화 몇 그루가 애처롭게 공사장 흙먼지를 뒤집어쓰고도 하얀 솜뭉치를 피어내고 있었다. 신축공사로 목화밭이 편입되면서 어렵사리 목화를 울밑으로 옮겨 심어놓았다. 모종이 아닌 공사로 인해 옮겨 심어기에 뿌리를 내리지 못할까 자식보다 더 애지중지 공을 드렸다한다. 이식으로 겨우 씨앗을 채취할 정도로 울밑에서 힘겹게 꽃을 피워 놓고 있는 목화다.

찬바람이 이는 날씨임에도 가지 끝에 활짝 핀 목화송이와 성숙한 다래가 바람에 휘청거리고 있다. 껌이 귀하고 목화가 흔할 때, 목화 다래를 껌처럼 열심히 씹었던 기억을 더듬으며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탱탱한 다래를 하나씩 꺾어들고, 껍질을 벗겨 예전처럼 꼭꼭 씹었다. 달짝지근한 목화열매가 입안에 톡 떠지는 그 느낌, 과거를 붙잡고 있는 묘한 맛이다. 한참동안 오물거리면 예전처럼 신기하게도 껌같이 쫀득거렸다. 문화해설사는 활짝 핀 목화솜꽃과 다래를 종이컵 가득 선물을 주셨다.

목화를 보면 여자의 일생과 흡사하다. 여리디여린 순백색 꽃을 피워 성숙하면서 점점 강인한 불그스레한 색으로 변하고, 떨어진 자리에 자신의 흔적으로 녹색 꼬투리를 맺는다. 그리고 한 번 더 하얀 솜으로 목화는 두 번 꽃을 피운다. 마치 여자아이가 성장하면서 성숙한 여인으로 거듭나 결혼으로 제2의 인생으로 살아가는 여자의 일생같이, 목화도 여자도 두 번의 삶을 사는 것처럼 너무나 닮았다. 이불솜으로 화사하게 꽃피우는 목화 그 목화솜이불을 혼수로 장만해가는 성숙한 여인, 곁에서 가까운 듯 먼 듯 그렇게 인연의 끈을 잡고 있다. 여자의 일생을 닮은 목화, 화사한 이면을 살짝 들여다보면 목화는 모성 같은 게 있다. 실바람에도 날아가 버리는 민들레 홀씨가 아니다. 하얗게 부풀어 오른 목화솜은 입김에도 금방 날아갈 것 같다. 그러나 매가 발톱으로 먹이를 움켜쥐듯 다래가 터진 흑갈색 받침대로 꽉 움켜잡아 솜이 날아가는 것을 막는다. 어머니가 자식을 보호하는 모성본능처럼.

여전히 입은 오몰 거리면서 목화솜을 따 씨앗을 채취하기 시작했다. 문헌에 의하면 세종임금은 만조백관을 모아 조야(朝野)에서 명하기를 “이 나라 백성이면 남자든 여자든 옷을 입는 것은 문익점 선생의 공덕인고로 동정을 달아 기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가벼운 캐시밀론솜이불이 보급되면서 목화솜이불도 한복동정도 개량한복으로 인해 사라지고 있다. 그럼에도 문화해설사가 어렵게 목화씨앗을 채취하는 건 한 가지 이유일 게다. 우리 것 민초의 삶이 깃든 목화`오장환의 우기'를 보면 장판방엔 곰팡이가 목화송이 피듯 피어났고 이 방 주인은 막벌이꾼…… 이라 했듯, 소박한 민중의 삶의 향기 그리고 시인의 문학세계를 기리고자 목화를 가꾸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날, 문화해설사가 싸준 다래 위쪽에 십자모양으로 칼집을 내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탱탱하던 다래가 조금씩 벌어지면서 네 쪽의 목화가 누에고치처럼 매끈한 속살을 들어내더니 솜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여자의 일생 같은 목화, 하얗게 피어오른 목화를 오늘도 가만가만 만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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