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추억들을 소환한다
눈은 추억들을 소환한다
  • 이창옥<수필가>
  • 승인 2017.11.2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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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이창옥

아침 7시 어김없이 알람이 울린다. 몸을 일으켜 습관처럼 거실 창가로 다가가 밖의 풍경을 살핀다. 온 세상이 하얗다. 자정 넘어 퇴근할 때 눈발이 성글더니 잠자는 사이 세상 풍경을 바꿔 놓았다. 늘 정면에서 눈인사를 나누던 우암산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함박눈이 부린 마술이다. 어느새 내 의식은 유년의 추억들을 소환하고 있었다.

그때도 눈이 참 많이 내렸었다. 오늘처럼 눈이 온 세상에 가득한 날이면 세 오빠는 갑자기 분주해졌다. 눈 쌓일 때를 대비하여 미리 준비해 놓은 올무를 챙겨들고 뒷산으로 사라졌다. 따라가고 싶은 마음에 오빠들 주위를 맴돌며 동동거려 보아도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세 오빠가 산으로 가고 나면 휑하니 비어 버린 집에서 나와 남동생은 마당에서 눈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사립문 옆에 쌓아둔 눈 더미에 물을 뿌려가며 미끄럼틀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놀면서도 마음은 오빠들이 있을 뒷산으로 달려갔다. 지금쯤 오빠들은 뒷골이나 수재골 어디쯤 있을까. 아니면 성재에 있으려나. 토끼는 몇 마리나 잡았을지 궁금해서 조바심이 났다. 그렇게 반나절을 마당에서 놀다 보면 오빠들은 양손에 축 늘어진 산토끼를 들고 개선장군처럼 돌아왔다.

오빠들 손에 들려온 토끼를 엄마는 무를 삐져 넣고 맛있는 토끼탕을 끓여주었고 어떤 날에는 만두의 속 재료가 되기도 하여 우리 가족의 맛있는 겨울철 별미가 되어 주었다. 먹을거리가 지천으로 넘쳐나는 요즘과 달리 먹을거리가 귀했던 그 시절에는 눈만 오면 오빠들이 잡아오던 토끼는 푸성귀만 오르던 밥상을 빛나게 해주던 귀한 식재료였다. 몰캉거리는 무와 엄마가 조금씩 나눠주던 쫄깃한 고기가 너무 맛있어서 날마다 눈이 오기를 몰래 빌기도 했었다. 눈이 내리는 날 꿈속에서는 나도 세 오빠 틈에 끼여 눈 쌓인 뒷동산을 바람처럼 내달리며 토끼를 몰고 있었다.

십분 간격으로 울리게 해놓은 알람 소리가 나를 현실로 불러낸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현실은 냉정하구나라고 혼잣말을 하며 서둘러 밥을 안치고 국솥을 확인한다. 눈길에 출근할 큰아이가 걱정되어 아이를 평소보다 일찍 깨웠다. 눈이 아파트 1층까지 쌓였다는 소리에 설마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부스스 일어나 베란다로 나가 확인하더니 피식 웃는다. 어쩌면 큰아이도 속을 푹신하게 채운 비료 포대를 들고 동네 언덕을 찾아 썰매를 타던 유년의 추억을 소환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눈은 잠시나마 나와 큰딸을 행복하게 해주는 마술을 부렸다. 어쩌면 잠에서 깨어날 남편도 작은아이도 눈이 1층까지 쌓였다는 내 호들갑에 베란다로 먼저 나가 눈을 바라볼 것이다. 남편은 내 호들갑이 어이없어 큰아이처럼 피식 웃을 터이고 작은아이는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눈은 모든 이들을 설레게 한다. 괜스레 어디라도 다녀와야 할 것 같고 동심으로 되돌리는 마력도 지녔다.

눈은 모든 이에게 순백의 빛으로 평등하고 추억을 소환하며 추억을 만들기도 한다. 동이 터 오르고 햇살의 눈 부심에 흔적 없이 사라질지라도 서운치 않으리라. 잠시 설레고 행복했었으니까.

오늘 아침 식탁 메뉴에는 내가 소환한 추억들도 함께 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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