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방명록
눈과 방명록
  • 김태봉<서원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7.11.27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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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만약에 겨울에 눈이 없다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로 삭막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나뭇잎 모두 떨어져 잔가지에는 찬바람만 스칠 뿐인 빈 나무에 찾아온 눈은 반갑고도 귀한 꽃이 아닐 수 없다.

서리와 얼음으로 얼어 갈라진 땅바닥은 눈을 만나면 금세 포근한 모습으로 변신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할 것 같은 이불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밤새 마당을 덮은 흰 눈은 세상에서 가장 큰 화선지가 되기도 한다. 고려(高麗)의 시인 이규보(李奎報)에게 눈은 무엇이었을까?

눈과 방명록(雪中訪友人不遇)

雪色白於紙(설색백어지) 눈빛이 종이보다 더욱 희길래
擧鞭書姓字(거편서성자) 채찍 들어 내 이름을 그 위에 썼지
莫敎風掃地(막교풍소지) 바람아 불어서 땅 쓸지 마라
好待主人至(호대주인지)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려주렴


눈이 하얗게 세상을 덮은 날, 흥(興)이 동한 시인은 갑자기 친구가 보고 싶어졌다. 이는 동진(東晋) 때 왕자유(王子猷)라는 사람이 큰 눈이 내린 밤, 문득 먼 곳에 사는 친구 대안도(戴安道)가 생각나 급히 하인을 불러 배를 준비하게 하고 친구가 있는 곳으로 찾아간 장면을 연상시킨다. 왕자유는 친구 집에 거의 다 이르러서는 흥(興)이 대했다는 이유로 친구를 보지 않고 돌아와 버렸지만, 시인의 경우는 이와 달랐다.

시인은 친구의 집에 당도해서 친구를 찾았지만, 친구가 출타하고 집에 없었던 것이다. 보통 같으면 친구가 없는 것을 허탈해하면서 그냥 돌아섰겠지만, 시인은 멀리 눈길을 무릅쓰고 만나러 온 친구가 집에 없다는 사실에 전혀 실망한다거나 아쉬워한다거나 하지 않았다. 도리어 담담한 기분이 되어, 친구의 집 마당에 쌓인 눈에 눈이 꽂히고 말았다. 친구에게 자신이 왔다 간다는 것을 어떻게 알릴까 궁리하던 찰나, 시인의 눈에 확 들어온 것이 바로 마당에 쌓인 눈이었다.

마침 남길 말을 써 놓을 종이를 생각하던 차였기에, 눈의 흰 빛깔은 곧바로 하얀 종이를 연상시켰다. 마당에 쌓인 흰 눈이 종이 노릇을 하려면, 거기에 들어맞는 붓도 필요할 터인데, 마침 벽에 걸린 채찍이 눈에 들어왔다.

채찍을 들어 이름 석 자를 쓴 시인은 유유히 친구 집을 나서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친구가 돌아올 때까지 바람이 불어 눈 위의 이름을 지우는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이 시에서 시인의 풍류는 앞이 왕자유 못지않다고 할 것이다.

겨울에 눈이 내리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다. 이 눈을 보고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생각을 하는 것 또한 자연스럽다. 이왕이면 눈을 보고 따스함 포근함 여유로움 같은 말을 떠올리면 좋으련만, 세상은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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