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모(卒母)
졸모(卒母)
  • 정명숙<수필가>
  • 승인 2017.11.23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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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정명숙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 셋이 거울 앞에 앉아 있다. 공교롭게도 같은 연배의 할머니들이다. 짧게 커트를 치고 파마를 하거나 염색을 하고 있다. 요즘은 여자들이 모인 곳에서의 첫인사가 김장은 했느냐고 묻는 것인데 여기서도 예외는 아니다.

손님 사이의 연결고리가 되는 미용사가 나에게 먼저 묻는다. 예년과 비교하면 반으로 줄어든 80포기의 배추로 김장을 끝내고 보리쌀 띄워 고추장까지 담갔으니 남은 일은 서 말의 메주콩 삶을 일만 남았다고 했다.

옆 사람도 일찌감치 김장해서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고 하는데 오 남매 김장까지 해 주려면 200포기를 담가야 한다는 한 사람만 아직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딸들이 와서 도와주겠다는 것을 오지 말라고 단호하게 거절했단다. 손주들까지 와서 법석거리면 치다꺼리가 더 힘들어 차라리 혼자 하는 게 편하다며 손사래를 친다.

미장원에서의 수다는 김장 얘기를 시작으로 희생이라는 단어에 매어 자식들로 말미암아 겪어야 하는 고달픔의 부유물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여자의 인생단계는 남자보다 뚜렷하다. 최종 목적지는 어머니가 되고 할머니로 마무리된다. 어머니가 되면 모성이라는 단어에 숭고함이라는 수식어를 달아 수많은 역할이 부여됐다. 자애롭게 자신을 희생하며 가족에 대한 헌신과 보살핌을 기대하는 이미지가 모성애의 정의로 고착되어 있어 엄마로서의 역할보다 개인의 욕구가 고개를 들면 자책감이 들게 만든다.

자식이 결혼으로 인해 분가를 하고 할머니가 되면 고달픔은 배가 된다. 의존적인 관계가 된 것은 자식보다 엄마인 내 탓이 크다. 충분히 제 할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나이 든 자식들이 혹여 입맛이 없을까 봐 김장을 하고 장을 담그고 자신의 힘든 삶을 닮아가는 게 안쓰러워 자식이 넘어야 할 고비를 대신 넘으려 한다. 힘들다고 푸념하면서 자신을 필요로 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더 크니 의존성만 키우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일본의 만화가 `사이바라 리에코'는 마이니치신문에 `매일 엄마'라는 만화를 종료하면서 실제 엄마의 역할도 졸업한다며 졸모(卒母)을 선언했다. 그날부터 고등학생인 딸을 아침에 깨우지도 않고 도시락도 싸주지 않는다고 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수능준비로 예민한 우리나라의 엄마였다면 단호하게 졸모 선언을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혼자 살아갈 힘을 키워주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오히려 자기만의 시간을 갖게 되니 여유롭고 행복하다고 하는데 비난의 소리도 만만치 않다.

미장원에서 가운을 입고 앉은 할머니들도 비난의 소리에 무게를 둔다. 장성한 자식들이라 이젠 알아서 하게 둬야지 하면서도 때가 되면 그 많은 김장을 하고 장을 담그고 아이를 맡기면 봐 줄 수밖에 없는데 죽기 전까지 졸모 선언은 언감생심이란다. 거울 속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에 긴 한숨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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