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논
빈 논
  • 신금철<수필가>
  • 승인 2017.11.21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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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신금철

논배미 하나 가득 풍요롭던 들녘엔 땀으로 젖은 농부의 발길마저 끊어지고 가끔씩 바람이 뒹굴다 사라진다. 품에서 키운 나락 들을 다 떠나보낸 휑뎅그렁한 들녘이 애처롭다.

들녘에 하얀 붓꽃이 필 무렵, 겨울을 견딘 빈 논은 가슴 떨림으로 여린 모들을 품고, 흙은 그들이 몸을 지탱하기 위해 잔뿌리를 내리는 동안 힘겹지 않도록 부드럽게 해주는 수고를 했을 것이다.

농부들은 행여 벼들이 벌레의 해를 입지 않을까, 비바람에 쓰러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고, 햇볕과 바람과 흙이 함께 벼들을 키워주었다. 정성으로 키운 벼 포기에서 이삭이 피기 시작할 땐 환희의 노래도 불렀으리라.

드디어 황숙기에 접어들어 벼가 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이고 통통 여문 낱알을 바라볼 땐 흐뭇하여 잠을 못 이룬 적도 있었겠지?

어느 날 농부가 트랙터를 들이대어 벼 이삭이 잘려나가던 날, 포대마다 가득 여문 벼를 채우는 농부의 보람 저편에 다 키운 자식을 떠나보내는 빈 논의 허전함이 가슴을 훑는다.

연례행사인 김장을 하느라 아들, 며느리, 손주들이 다 모여 왁자지껄하던 거실에 찬바람이 분다. 빨간 장갑을 끼고 기운차게 양념을 버무리던 아들의 모습과 김칫소를 넣으며 도란거리던 며느리들의 예쁜 모습, 털목도리 꼬리를 등에 달고 신기한 듯 통통거리던 손녀와 긴 고무장갑을 끼고 바지에 벌겋게 김칫국물을 묻히며 한몫 거들던 손자의 모습도 미소 짓게 한다.

김치 양념을 준비하느라 전날 새벽 2시까지 잠을 못 잤는데도 피곤한 내색을 하지 않고 자식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했던 그날의 모습이 엊그제인데 어느새 나는 그들이 그립다.

해마다 김장을 하는 날이면 으레 보쌈을 먹으며 나누는 담소는 가족 화합의 장이요, 우애의 장이며 자식을 낳아 키운 보람의 장이었다.

각자 담은 김치를 들고 아들 삼 형제는 모두 제집으로 돌아갔다. 자식들이 돌아가고 나는 적막감이 흐르는 거실에서 침묵과 고요와 마주 앉아 있다. 행여 그들마저 가버릴까 두려워 잔뜩 붙들고 있다. 싹 틔우고 거름 주고 햇볕 쬐어 곡식을 키워 떠나보낸 빈들의 허전함처럼 자식을 분가시키고 가끔 빈 둥지에 남은 허전함에 젖는다.

자연은 다 내어주고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또한 이별의 앞에서 슬퍼하지 않으며 희망을 잃지 않고 봄이 오면 다시 싹 틔우고 키우며 열매를 맺는다.

힘들게 김장을 하여 주시던 어머니처럼 며칠 동안 김장 준비를 하느라 힘들었던 나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아도 행복하다. 다만 엄마가 해준 김치를 맛있게 먹으며 `엄마 표 김치'임을 생각해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나 또한 그들의 노고와 정성이 함께 들어간 김치를 먹으며 자식들을 생각하리라.

지금은 빈들이지만 추위를 이겨낸 논엔 따뜻한 봄이 오면 또 하나 가득 여린 모들이 심겨지고 정성과 사랑으로 그들을 키워 내겠지.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벼를 키우는 빈 논처럼 나 또한 자식들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퍼주는 어미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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