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과 지진, 그 평등의 아름다움
수능과 지진, 그 평등의 아름다움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7.11.21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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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결국 대학수학능력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뜻밖의 지진으로 인해 사람과 땅이 함께 떨어야 했던 조바심의 한 복판에서 초유의 수능 연기에 대한 국민들의 생각은 여전히 분분하다.

전격적인 수능 연기 발표 이후, 이미 버린 참고서를 비롯한 수험서를 다시 찾으려 애쓰다가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는 수험생에 대한 보도를 본 어른들은 대체로 못마땅한 분위기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청춘들의 성급함과 단 한 번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도박 같은 일회성에 경도되는 철없음을 나무란다.

천만에, 이런 어른들의 반응은 수험생들이 겪었거나 겪고 있을 숨 가쁜 고통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는 12년 동안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청춘들은 오로지 대학입시에 매몰되어 간신히 살아남아 있다. 수능 하루 전날 그동안 옥죄였던 참고서며 수험서를 버리는 일은 그들에게는 장엄한 의식 같은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돌아 올 수도 돌아볼 수도 없는, 말 그대로 퇴로를 아예 막아버리고 전장에 나서는 병사의 처지와 다름없다. 그만큼 그들은 간절하고 절박하다. 수능, 그 하나에 남은 인생이 송두리째 좌지우지되는 한국의 서글픔이다.

예측할 수 없는 지진으로 인해 연기된 수능에 대해 사람들은 또, 포항과 그 이외의 지역을 함부로 나누며 편을 가르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어른들의 기득권 편의와 힘에 대해, 그 불편함에 대해 지진피해지역의 수험생들을 걱정하는 경쟁자 청춘들의 격려가 훨씬 성숙하다. 졸지에 힘들고 떨리는 처지에 놓인 경쟁자들에게, 다른 사람이나 다른 지역의 피해쯤은 아랑곳없이 나만 괜찮다면 불공정쯤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는 어른들의 세계에 청춘들은 오히려 따뜻하다.

(지진으로)두렵고 떨리는 가슴이 완전히 진정되지 않더라도 잠시 멈추거나 길을 바꾸더라도 기다렸다가 함께 출발하자는 배려가 비로소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아름다움이 아닌가.

수능은 얼마간 예측할 수 있으되, 지진은 뜻하지 않으며 사전에 충분히 예고되지 못한다. 수능은 거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한 번쯤은 거쳐야 할 보편적 통과의례일 것이고, 지진은 이 조그마한 땅덩어리에서도 (지역에 따라)공포이거나 그저 우려 정도의 불안에 그치는 정도의 극명한 차이를 보일 만큼 특정적이다.

그 차이가 지진으로 인한 수능 연기를 계기로 재난이 결코 국민이라면 어느 누구도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 될 수 없다는 것으로 각인되며 새로운 경각심으로 극복되고 좁혀지는 계기가 되고 있으니, 세월호 참사 당시와는 확연히 세상은 달라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성의 우월성이나, 인간과 종교의 자유, 관용, 평등의 주제를 전파시키는 근대계몽주의는 1755년 11월의 리스본 대지진의 재앙을 거쳐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인간의 욕망과 상관없이 자연재해는 사람마다 구별해 선악을 가리지 않는다. 지진과 같은 자연 재앙의 원인과 극복의 의지 또한 신의 뜻이 아닌 인간의 이성에 따라 예측되거나 재건될 수 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자연재해를 `신의 뜻'이라거나 `하늘의 경고'로 둔갑시켜 오로지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끌고 가려는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고통을 함께 나누고, 불가피하게 더 힘들고, 더 위험하며, 더 불안한 지진 피해지역 수험생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일. 그리하여 수능에 대한 초조함이 일주일 더 늘어나더라도 함께 기다려주며 불편부당함 없이 다시 비슷한 출발선에서 서로 평등하게 시작하는 일은 아름답다.

대다수와 기득권의 힘에만 쏠리는 것이 아니라, 손해가 불가피한 작은 집단에 대한 배려, 그리고 그런 국민의 마음에 힘이 모아지는 나라.

그런 촛불의 힘이 포항 지진피해지역 수험생과 더불어 이 땅의 모든 2017년 수험생들에 커다란 빛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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