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공직비리 척결 방식
세종의 공직비리 척결 방식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7.11.19 18: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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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 권혁두 국장

세종 8년(1426년)에 터진 `김도련 노비조작사건'은 조선시대 최악의 권력형 비리로 꼽힌다. 다수의 고관들이 김도련이라는 인물로부터 뇌물을 받고 파렴치한 범죄에 개입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때 오간 뇌물이 금품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국가 서열 3·4위인 좌·우의정을 비롯한 전·현직 고위 관리들이 노비를 뇌물로 받고 부당하게 권력을 행사했다.

김도련은 멀쩡한 양인 가족을 도망간 자신의 노비로 조작해 사유화하는 악행을 일삼던 인간이었다. 가짜 노비문서를 관청에 제공하고 원하는 판결을 얻어내는 과정에서 고위층 곳곳에 노비를 상납했다. 세종이 직접 조사한 결과 17명의 관리가 김도련으로부터 132명의 노비를 수수한 것으로 드러났다. 좌의정 이원이 4명, 우의정 조연이 15명, 곡산부원군 연사종이 15명을 받았고 병조판서 조말생은 무려 36명을 뇌물로 챙겼다. 이들은 실무를 담당한 관리들에게 압력을 넣어 김도련이 제기한 송사를 왜곡했다. 이들의 도움으로 김도련이 부당하게 취득한 노비가 426명에 달했다.

그런데 이들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세종과 사헌부 등의 대간((臺諫)들이 숱한 마찰을 빚었다. 세종은 뇌물을 받은 관리는 물론 사주를 받은 실무 책임자들까지 수십명을 파면하고 일부는 귀양을 보냈다. 그러자 3사(司))의 대간들이 죄질이 가장 나쁜 조말생 만큼은 사형에 처해 조야에 경종을 울려야 한다며 들고일어났다. 당시 조선의 율법이던 대명률(大明律)의 뇌물수수죄 처벌기준에 따르더라도 그는 사형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세종은 선대의 공신을 죽일 수 없다며 귀를 닫았다.

세종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유배 보낸 지 한 달 만에 좌의정과 곡산부원군의 사면과 복직을 지시했다. 3사가 벌떼같이 일어났지만 어명은 강행됐다. 그러자 대간들은 상급자의 겁박을 받아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던 아래 관리들도 사면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세종은 이렇게 반박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신들이 뇌물을 받은 것은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범한 실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실제로 일을 처리한 관리들은 사사로운 정을 떨치지 못하고 지엄한 국법을 유린했다. 누구의 죄가 더 중한갚. 신하들이 “몸통은 관용하고 깃털만 털어서야 오랜 폐단이 근절되겠느냐”고 간언했지만 세종은 요지부동이었다.

측근을 구제하기 위해 궤변을 동원한 것인지, 실제 세종의 소신이 그랬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쨌든 실록에 드러난 세종의 생각은 나랏일을 맡은 관리가 상급자의 부당한 지시에 굴복한 죄는 압력을 가한 상급자의 죄보다 크다는 것이었다.

국정원장 3명에게 동시에 구속영장이 청구되고 2명이 구속되는 전무후무한 일이 터졌다. 현직 검사장이 구속된 것도 전례 없는 일이다. 청와대에 상납한 특수활동비와 관련해 3명의 국정원장은 모두 청와대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 국정원 파견근무 당시 검찰의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를 방해한 혐의로 구속된 검사도 윗선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다고 했다. 지난 정권의 국정농단에 연루돼 법정에 선 사람들도 한결같이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하수인이었음을 강조했다. 이승철 전 전경련 부회장은 안종범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의 지시를 받아 기업에 돈을 할당했다고 했다. 안종범과 정호성은 대통령의 지시를 따랐다고 했다. 차은택은 최순실이 시켰다고 했다. 이재용 삼성 부회장은 대통령의 강압적 지시에 어쩔 수 없이 최순실의 딸에게 말을 사줬다고 주장했다.

서민들은 얼굴 구경 하기도 어려운 막강한 인물들이 자신은 무력한 하수인에 불과했다는 고백을 앞다퉈 하고 있다. 그래선지 상급자의 지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불법에 가담한 사람들은 정상을 참작해야 한다는 동정론이 일고 있다. 자발적 의지와 가담의 적극성 등을 따져서 처벌 수위를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 내부고발자 보호법과 상급자의 부당한 지시에 대한 거부권을 인정한 대법원 판례가 현장에선 무용지물이 되고 있는 현실을 봐도 그렇다. 공직자의 소신을 지켜줄 제도의 보완이 절실하다. 그러나 부패한 상급자보다 실무자에게 더 무거운 책임을 물었던 세종의 판단도 곱씹을 필요가 있다. 그렇지않아도 위에서 시키는 대로 만 하면 탈이 없다는 보신주의가 판을 치고, 공직자들이 국민이 아닌 인사권자에게 종사하는 나라가 된 지 오래다. 공직을 좀먹는 맹종의 관행을 타파하기 위해서라도 `지시를 받아 수행했을 뿐'이라는 변명을 관용으로 감싸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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