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을 불러내다
그리움을 불러내다
  • 최명임<수필가>
  • 승인 2017.11.16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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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최명임

누군가 은행나무 숲에 황금색 융단을 깔아놓았다. 사람들이 가을을 기리며 걷고 있다. 집착을 버린 듯 남은 잎들이 그들 위로 우수수 떨어진다. 새날을 위한 마지막 피날레다. 우리는 저 낡은 파편의 체념이 없는 한 내년 봄 첫날이 올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가을을 만끽하고 내려오는 길에 새 지붕을 이는 초가가 눈길을 붙든다. 가슴이 뭉클하다. 어느 하루가 기억의 회로를 돌기 시작한다. 사다리를 타고 지붕을 오르내리는 저 일군들의 모습이 그날로 겹쳐진다. 비알진 지붕에서 추임새처럼 일손을 주고받으면 어느새 이엉은 지붕 한 바퀴를 돌아왔다. 그러기를 수차례 마지막으로 용마름을 얹고 내려오면 지붕은 신선했다.

그 밤엔 달빛이 더 천연스러웠다. 초가는 소박한 언어로 달빛을 가로채어 그 처마 밑 사연을 낱낱이 기록했다. 요란한 개화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흐르고자 하는 명성황후의 뚝심 앞에 대원군의 아집 같은 기와집 몇 채만 흔들리지 않았다. 낡은 짚 지붕은 패배한 아군처럼 무너져 내리고 양철지붕이 번쩍거렸다.

아버지는 그날 오빠 손을 이끌고 지붕을 오르셨다. 올라보고 싶다는 아들을 이끌며 내심 당신의 뒤를 이어 태산준령 같은 삶을 이끌고 갈 아들에게서 희망을 보셨으리라. 오빠는 백두산 등정이라도 한 듯 환호성을 내게 보내왔다. 일군으로 온 서 마지기 농사꾼 봉두 아재도 꿈을 꾸었다. 더 이상 이엉을 엮는 구시대적 풍경은 사라졌다.

나는 가끔 물초가 되어버린 짚 지붕의 낙숫물소리가 그리웠다. 도시의 징한 소음에 묻혔다가 돌아오면, 나른한 오후 빗소리에 묻혀 혼곤히 잠에 빠져들던 그 침잠의 시간이 그리웠다. 짚 지붕 결 사이로, 고샅고샅 흘러내리다가 땅으로 은근슬쩍 뛰어내리는 빗소리는 비몽사몽 중에 들리던 어머니의 구전동화처럼 나직하고 정겨웠다. 사라진 것은 추억 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더 애틋한 걸까.

양철지붕은 짚 지붕처럼 완만하거나 도타운 구석도 없이 짐짓 신선한 개화의 눈빛만 보내고 있지만 정겨운 구석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억지로 올려놓은 박 덩어리가 불안하고 서로 데면데면 부조화를 이루고 있는 풍경도 낯설었다. 얄팍하기 짝이 없는 지붕으로 화급한 빗소리가 난타하면 마음이 따가웠다.

양철지붕의 난타는 개화의 소리였다. 요란했다. 동네 아낙들이 비녀를 버리고 삼단 같은 머리채를 싹둑 잘랐다. 어머니는 파마를 하고 온 날 무명수건을 잠자리에 들 때까지 쓰고 계셨다. 뒷날, 양철지붕의 얍삽한 속내처럼 속도 없이 부풀려진 머리를 보고 아버지는 기함하셨다. 증조부 댁 기와집은 대원군의 아집처럼 꿋꿋이 남았고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비녀를 빼지 못했다.

얼마 전 고향에 다니러 갔더니 기와집은 사라지고 퇴색해버린 기왓장만 나뒹굴었다. 마침내 무너지고만 대원군의 아집 같기도 하고 외압에 견뎌내지 못한 조선의 모습 같아서 서글펐다. 물은 흘러도 그 본질은 변함없음을 이제야 깨우친 듯 기왓장 사이로 초록 풀이 무성하고 마당에 무궁화가 나직이 피어 있었다.

나는 아직도 기억 저편에다 초가집을 품고 있다. 후끈한 온돌방에 몸을 누이는 상상을 한다. 후드득 봉창으로 뛰어드는 빗소리와 짚 지붕의 소리 없는 빗소리를 들으며 한잠 푹 자고 싶다. 누가 뭐라 하겠는가. 아직도 초고속으로 몰려오는 개화의 물결 속에 고요히 찾아드는 저 아슴푸레 한 시간들을….

초가집은 의당 벗어나야 할 문맹이었다. 하지만 내겐 삼베 적삼에 배어 있던 어머니 체취였다. 그래서 그 양반의 아집처럼 꼭꼭 붙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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