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에 서다
오름에 서다
  • 안희자<수필가>
  • 승인 2017.11.08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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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안희자

잰걸음으로 가을이 가고 있다. 그 가을을 붙잡고 싶어 창공 위를 날아갔다. 설렘으로 찾아간 그곳, 제주의 오름을 가슴에 담고 싶었다. 제주에 수차례 왔었지만 멀리서 능선만 바라보고 실행에 옮기지 못했었다. 제주 한림읍에 자리한 금오름은 오름 중에 코스가 짧아 오르기 수월한 곳이란다. 가을 금오름은 어떤 풍경일까.

가파른 오름을 올려다보니 까마득하다. 설렘도 잠시 몸이 바짝 긴장하고 움츠러든다. 누구는 오르지 못할 거라 하고, 누군가는 할 수 있다며 긍정의 말로 부추긴다. 이내 정상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발걸음마다 바람이 작정한 듯 휘몰아친다. 몸이 휘청거린다. 바람에 몸을 맡긴 건지, 몸이 바람에 기댄 건지. 비탈진 오름을 허정거리며 기어오른다. 오름이 작다고 깔보았던가. 아무리 봐도 기어오르는 내 모습이 네 발 달린 짐승 꼴이다. 욕심부려 걷다가 넘어지길 반복한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기진맥진이다. 위태로운 내 모습에 위로라도 하듯 억새 무리들이 하얗게 깃발을 나부낀다. 이 또한 거센 바람 탓이다.

드디어 정상에 올라섰다. 다리가 뻐근하고 몸은 천근만근인데 가슴은 벅차다. 고뇌하다 마지막 원고에 마침표를 찍은 기분이다. 보인다. 한가운데 움푹 팬 분화구에 시선이 꽂힌다. 그윽하면서도 커다란 저 눈동자, 가을 분화구의 우묵한 눈빛이 고요하다. 자식을 그리는 어머니의 애틋한 시선 같아 쓸쓸해 보인다. 깊고 넓은 곳, 내 발끝에 닿을 수만 있다면 그곳에 마냥 누워 뒹굴고 싶다. 아니, 어리광부리고 싶다. 그곳은 어머니의 품속처럼 포근하고 아늑하리라. 그 깊이가 52m라고 하니 넓이를 가늠할 수 있으리라.

오름의 정상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도심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구름조차도 손에 닿을 듯한 정상에서 바라본 풍광이야말로 한 폭의 수채화요, 한 편의 가을 시다. 멀리 한라산과 비양도 섬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이시돌 목장의 초원이 드넓게 펼쳐져 목가적인 풍경이 연출된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금세 초록물이 가슴속에 스며들 것만 같다. 또한 이곳은 패러글라이딩의 명소라 하니, 순간 나도 비상하는 새처럼 드넓은 하늘을 자유로이 날고 싶었다. 잠시 오름의 너른 품에 안겨 차 한 잔으로 지친 몸을 달랜다. 몸과 마음이 덩달아 너그러워진다. 오름이 말한다. 삶에 무거움일랑 내려놓으란다. 그래야 삶이 자연처럼 가벼워진다고. 올랐다는 기쁨도 잠시,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올라갈 때처럼 서로 배려하며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속도를 내거나 헛디디면 굴러 떨어지기 십상이다. 내려오는 길은 쉬운 줄 알았는데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몸으로 실감했다.

힘을 다해 올라서면 늘 내리막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보니 지나온 삶은 늘 그랬다. 고통을 짊어지고 정상에 오르면 환희의 순간은 가을처럼 풍요롭지만 누리는 시간은 짧았다. 미래의 내 삶엔 어떤 오름을 만나게 될까. 제주의 오름에서 바람을 맞으며 가을을 만끽한 여행은 신선했다. 바람에 맞서느라 온몸이 날아갈 듯 휘청거리고, 넘어지고, 기어올랐지만 자연 앞에선 작고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제주 오름이 아름다운 건 바람과 능선의 부드러운 곡선 때문이 아닐까. 드디어 대지에 내려섰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뻐근하지만 도전했다는 생각만으로도 뿌듯하다. 욕심부리며 오를 것도 없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땅을 걷는다. 무거웠던 발걸음이 이렇게 가뿐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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