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정토사의 `조신 설화'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
충주 정토사의 `조신 설화'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7.11.08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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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역사기행
▲ 김명철

춘추필법에 따른 사관의 기록정신을 바탕으로 편찬돼 임금도 볼 수 없다는 원칙하에 기록되었던 `조선왕조실록'. 조선의 백과사전이며 우리 역사의 보고로 평가되는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바로 이 실록을 보관했던 `충주사고'가 처음으로 존재했던 사찰이 바로 정토사(개천사)다.

그런데 정토사는 충주댐이 만들어지면서 수몰되어 후세대를 위한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수 없어 안타깝게 여겨진다. 특히 정토사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꿈을 통해 인간의 사랑과 욕망의 무상함,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민초들의 삶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조신 설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조신은 승려로서 경주 세달사 소속의 명주(지금의 강릉) 장원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임명됐다. 그곳에서 그 지역 군수의 딸을 본 뒤 그 아름다움에 빠져 낙산사 대비관음상 앞에서 그 사랑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수년 동안 정성을 다했으나 그녀가 이미 출가해 자기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게 된 것을 알고, 관음상 앞에 가서 원망하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다. 뜻밖에 그 여자가 나타나서 사실은 마음으로 그를 사랑해 왔으나 부모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억지로 남의 아내가 되었지만, 이제 함께 살기 위해서 왔다고 하였다. 그는 기뻐하여 그녀를 데리고 고향으로 가서 살림을 시작했다.

40년 동안 깊은 정을 나누고 살면서 자식 5남매를 거느리게 되었으나 가난하여 사방을 떠돌아다니며 10년 동안 걸식하였다. 명주의 해현령에서 15세 된 큰아들이 굶어 죽자 길가에 묻었고, 우곡현에 이르러서 길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부부가 늙고 병들어서 움직일 수 없게 되자 10세 된 딸이 걸식하였는데, 그만 동네 개에게 물려 드러눕게 되었다. 부부가 함께 통곡하다가 50년 동안 고락을 같이했으나 이제는 늙고 병들어 빌어먹기도 어렵고 자식들도 헐벗고 굶주려 어찌할 수 없으니 헤어져서 살아갈 길을 찾자고 하였다. 부부는 아이를 둘씩 나누어 헤어지려던 차에 꿈에서 깨어났다.

그의 머리는 백발이 되어 있었고, 속세에 살려던 뜻이 사라졌으며, 인생의 허무와 회한을 느꼈다. 그 길로 해현령에 가서 시체를 묻은 곳을 파보았더니 돌미륵이 나오므로 이를 이웃 절에 봉안하였다. 그 뒤 충주로 와서 정토사를 창건하여 부지런히 정진했다.

허황된 것처럼 보이는 조신의 꿈은 당시 신라 말기 모든 백성의 꿈이었을 것이다. 당시 정부와 지도층은 왕위쟁탈전으로 백성의 삶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토지를 소유한 중앙의 귀족과 사원들도 수많은 토지 관리를 위해 관리인으로 지장을 두었다. 조신도 바로 그 지장 중 한 명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수많은 농민은 과중한 세금을 납부해야 했고,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된 농민들 가운데는 굶어 죽거나 견디다 못해 산속의 화전민이 되기도 했다. 자연재해 마저 잇따르자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곤궁해졌는데, 조신 가족들의 떠돌이 생활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문제의 심각성을 알게 한다.

꿈에서 깬 조신이 꿈속에서 죽은 아이를 파묻었던 자리에서 돌미륵을 얻게 되는 장면이 있다.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원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불교적 메시아사상인 `미륵신앙'의 표현이며, 신라 말기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호족들이 새로운 사상과 비전으로 만든 새로운 나라가 도래했다는 의미이다.

조신 설화는 모든 것이 허무하고 꿈과 같지만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민초들의 소박한 행복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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