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이유
가을의 이유
  • 이재정<수필가>
  • 승인 2017.11.07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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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이재정<수필가>

우체국 마당이 온통 붉다. 풋대추가 여름을 견디지 못하고 무더기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가지에 매달려 얼마를 버티다 놓은 손이었을까. 땅위에서 뒤척이며 몇 날이 지나자 마당위에서 빨갛게 익었다. 풋풋한 시간을 잃은 쭈글쭈글한 모양이다. 나무에 온전히 매달려있는 열매보다 떨어진 것들에게 더 눈길이 간다. 억지로 단풍나무색을 입힌 것이 안쓰럽기 때문이다.

눈을 산으로 옮겨놓으니 색옷을 입고 있다. 북쪽으로부터 시작하여 남하하면서 높은 산을 서서히 물들이며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 빛깔이 짙어갈수록 덩달아 구경나온 사람들로 산은 색색이 물든다. 골짜기마다 감탄이 메아리로 울린다. 갈바람이 잎마다 색소를 뿜어대면 자지러지는 사람들. 울긋불긋한 산 앞에 시끌시끌한데 나는 동요가 없다. 저토록 고운 단풍에 도리어 마음 끝이 시려온다.

내 앞에 와있는 가을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온 산을 물들이는 컬러의 붓터치가 지나간 자리에 내 마음은 숭숭 구멍이 난다. 소소리바람으로 몰려와 내안에는 통로가 생긴다. 그 길로 상강(霜降)에 쫓기듯이 질주해 오는 나의 가을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순간, 뒤돌아서서 외면을 하고 만다.

감히 자연의 순리를 거부한다고 될 일이랴. 봄꽃보다 더 고운 게 단풍이라고 한 법륜스님도 우울증에 빠지기 쉬운 중년을 위로하기 위함일 것이다. 순응해야 함을 알기에 노래를 빌려 위안해 본다.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것이라고. 이래저래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스님의 자비의 말씀도 소용없다. 허무함이 달래지지 않아 알알한 마음은 몸살을 끌어들이고 만다. 몸이 무거워지고 열과 오한이 번갈아 변덕을 부리며 밤의 길이를 길게 늘어뜨린다. 감기증상이다. 중년의 감기를 숨기지 못하고 연신 기침으로 콜록대고 있다. 아플 만큼 아프고, 앓을 만큼 앓아야 낫는 고뿔인가 보다.

이즈음이면 단풍구경 가자고 조르던 내가 조용하자 그이가 먼저 말을 꺼낸다. 별 반응이 없자 가만가만 나를 살핀다. 신경이 쓰이는 눈치다. 동갑인 그이도 같은 계절을 걷고 있을 터이다. 까칠한 나에 묻혀 숨죽이고 있는 그이다.

가을의 속도가 초초 빨라지고 있다. 나무가 물들어가는 것은 생존의 몸부림이다. 줄기에서 잎으로 가는 관다발을 차단하여 잎을 떨구기 위한 처절한 갈등인 셈이다. 잎의 아우성이 처연할수록 단풍은 더 고와진다. 나무는 저의 전부를 과감히 저버리기로 결정하면서 절정에 선다. 소유와 집착을 버릴 때 비로소 아름다운 단풍이 되는 것이다.

무더운 여름날의 따가운 햇볕을 견뎌내고 도착한 가을이다. 처음에 꼭 잡은 두 손이 느슨해져서 풀어졌다 해도 그이와 어깨를 나란히 한 길이다. 한 발 앞쪽에서, 때로는 뒤쪽에서 뒤쳐져 지켜보며 함께 걸어온 길이다. 다가올 겨울의 추위를 지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또 둘이 가면 된다. 느리면 조금 기다려주고 빠르면 걸음을 늦추면 된다. 서로의 그림자가 되어 붙어서 가면 되는 것이다.

이제, 마주보며 물들어 가리라. 은행나무나 옻나무의 화려한 색이 아니어도 실망할 일이 아니다. 또한 같은 색이 아닐지라도 서운해 할 것도 아니다. 서로 다른 엽록소를 인정하며 단풍으로 피어나리라. 그것이 내가 살아야 할 가을의 이유다.

내 옆에 잠잠히 있는 그이에게 넌지시 물어볼 참이다.

“당신의 가을은 괜찮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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