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또는 우리 이야기
나, 또는 우리 이야기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7.11.07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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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엄청 높았던 경쟁률(그 당시 기억으로 100대 1은 훌쩍 넘은)을 뚫고 신문기자 공개채용시험에 합격한 후 받았던 기본교육은 아직도 생생하다.

30년가량 세월이 흘렀음에도 `중학교 2학년 정도의 지식수준을 갖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문장'이거나, 심지어 `기사 작성은 성경을 쓰는 일과 같다'는 선배 기자의 가르침은 여전히 뇌리에 뚜렷하다.

그 가운데 `그날 세상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뉴스'에 대한 질문과 `바로, 자신의 이야기'라는 정의는 지금도 유효적절하다.

종이신문을 정기구독하지 않는 사람도 “당신에 대한 이야기가 신문에 실렸다”는 주변의 말을 듣게 되면 가판대를 뒤지든 신문 정기구독자를 수소문하든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반드시 찾아 읽게 된다는 설명. 약간 과장되기는 했지만 “심지어 한반도에 당장 전쟁이 벌어져도 `내 이야기'가 실린 신문을 찾는 일은 어김없을 것”이라는 선배기자의 단언은 지금도 당연하다.

대학 1장에 나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즉 나를 비롯해야 가정도, 나라도, 천하도 평온할 수 있다는 순서와 이치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진리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또는 우리)의 이야기'를 기꺼이, 부담 없이 선뜻 하지 못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나는 <수요단상>을 화요일 새벽에 쓰고 있다. 대개 하루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이르러 원고를 보내는데, 시간을 크게 앞당길 수밖에 없는 개인 사정이 곤혹스럽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이 1박2일의 일정으로 우리나라를 국빈 방문하는 첫날. 당연히 각종 뉴스가 쏟아져 나올 것이고, 수요일(8일자)신문에는 그에 대한 보도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 시간과 공간을 앞당겨 `아마 이럴 것이다'라고 추측하거나 예상할 수 없는 것이 트럼프의 그간 행보이고, 대한민국이 처한 처지라는 것이 참으로 곤혹스럽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미국에 대해 `나(또는 우리)의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있다. 동맹이라는 이름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분단 조국의 현실과, 휴전이라는 엄연한 현재진행형을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에서 함부로 전쟁의 위협에 내몰리고 있다.

심지어 군사독재 시절에도 호기롭게 외쳤던 `자주국방'의 의지는 실종되고 은근슬쩍 `자강'이라는 축약의 대체재에 매몰되고 있는 시대의 살얼음판을 힘겹게 건너고 있다.

북한은 여전히 위협적이고 호전적이며, 미국을 비롯해 일본과 중국 등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의 기류변화도 심상치 않은, 말 그대로 사면초가의 처지에 놓여 있음은 물론 힘겨운 일이다.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자국 패권주의에 대화와 평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은 허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와 평화는 과정의 연속선상에 있고, 전쟁은 끔찍한 비극을 초래하는 결과만을 낳을 뿐이다.

한반도에서의 전쟁 위험은 분단과 휴전이라는 엄연한 현재진행형이 멈추지 않는 한 거듭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당장 월드컵을 앞둔 지난 2002년 미국대통령 부시의 방한을 앞두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단정하며 극단의 대북 정책이 (미국에 의해)제시되었으며, 그때 우리는 김대중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을 공격하지 않겠다. 인도적 지원도 하겠고 북한과의 대화도 고려한다'는 부시의 태도변화와 연설을 이끌어 낸 경험이 있다.

우리는 세계를 놀라게 한 `촛불'로 민주주의를 국민 스스로의 힘으로 커다랗게 진전시켰고, 세계인이 주목할 스포츠 제전 평창동계올림픽을 목전에 두고 있다.

`나(또는 우리)의 이야기'를 통해 다름과 틀림을 구분할 줄 아는 한·미 정상의 진솔한 대화를 기대한다. 평화는 서로의 영혼이 존중되는 공간을 통해 견고하게 유지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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