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가라 하네
걸어서 가라 하네
  • 최명임<수필가>
  • 승인 2017.11.06 17: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 최명임

쏜살같은 문명의 기구를 타고 왔다. 어언 예순 해이다. 무엇을 찾아 그리 달려왔느냐고 물으면 명쾌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대관절 그토록 숨 가쁘게 달려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나를 보니 안쓰럽고 눈물겹다.

지나온 길만도 수만리인데 해는 여전히 뜬다. 길을 나서라는 부단한 재촉이다. 지금까지 육신의 살을 찌웠다면 이제는 휑하니 비워 버린 가슴을 채우려 길을 나선다. 하지만 내가 사는 고치 속은 너무 안온해서 어제처럼 안주하고픈 욕구에 갈등한다. 한 걸음 내딛는 일은 허물 한 겹을 벗겨 내야 하는 일, 소소한 일상을 접고 마음을 내어본다.

대문을 열고 나서는 일이 두렵다. 팔삭둥이처럼 여물지 않아서 낯선 것에 더럭 겁이 난다.

약속 장소에서 동행을 만났다. 그녀 또한 무엇을 얻으려고 먼 곳에서 이리 바삐 달려왔을까. 상기된 얼굴로 화사하게 웃는 그녀를 보니 분명 일탈의 즐거운 행각이요, 당찬 도발이다. 그녀와 나의 오늘은 부단히 달려온 인생길에 맛보는 신선한 충격이요, 특별한 하루가 될지도 모른다.

도서관이 첫걸음인 그녀에게 길을 안내하지 못했다. 한 학기를 쫓아다닌 도서관 길을 모르다니 한심스럽다. 문명의 기구에만 의지했으니 나는 목적지만 기억하고 있다. 하늘도, 숲도, 사람도 외면하고 길은 더더욱 보지 못했다. 한 번쯤 찾아가는 길을 눈여겨 보아둘걸, 뒤늦은 후회를 하였다.

결국, 그녀가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청했다. 사람보다 우월한 듯 선선히 길을 안내한다. 가는 길에 수다 삼매경에 빠져 길을 놓쳐버렸다. 내비게이션도 혼란에 빠졌다. 시간이 저 먼저 부리나케 가버린다. 시간은 결코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서글픈 사실에 직면한다.

앞만 보고 달려온 내 삶도 그러했다. 어찌 길 도우미도 없이 그 오랜 시간 길 없는 길을 찾아 예까지 왔을까. 비로소 멈추어 서서 빈손을 바라보니 헛헛함이 가슴에서 풀무질한다. 그렇더라도 나에게 사랑한다고 애썼노라고 토닥여 주고 싶다.

오늘은 사람 책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눈이 짓무르도록 깨알 같은 글씨에 집중하지 않아서 좋다. 들을 귀와 담아 들일 가슴만 있으면 족하다. 다 소화하지 못해도 즐겁다. 콩나물이 물의 흔적만으로 자라듯이 나도 돌아서면 그 맑은 샘물을 모두 흘려버릴 것이다. 한 방울이면 어떠랴, 포만감이 느껴지고 감동으로 가슴이 뻐근해져 오는 것을.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사람 책에서 찾은 한 구절이다. “여러분, 도서관까지 걸어서 오세요.” 앞만 보고 치닫는 나에게 사방을 둘러보며 천천히 걸어서 가라는 듯. 따끔한 충고가 되어 나의 허점을 찌른다. 안타까워라, 일직선상에서 달리다 보니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렇다. 길은 걸어야 맛이다. 마음이 몹시 더운 날 문명의 기기를 모두 걷어내고 호젓하게 걸어 보아야겠다. 느림은 강한 이끌림으로 나의 동공을 부풀리겠지. 벅차오르는 감동은 즐기되, 무엇을 찾아내려 애쓰지 말고 보이는 대로 보아야만 보일 것이다. 그러면 동동걸음으로 달려온 나와 그들과의 거리가 한 치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희열을 맛보게 되리라. 시간은 제멋대로 가더라도 나는 내 멋에 걸어서 가야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