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괴산의 인물 소요당 박세무와 동몽선습비
역사 속 괴산의 인물 소요당 박세무와 동몽선습비
  • 김홍숙<괴산군문화해설사 · 소설가>
  • 승인 2017.11.05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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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김홍숙

괴산읍 검승리에는 애한정이라는 곱고 단아한 정자가 있다. 지금은 농업역사박물관이 개관되어 많은 사람의 발길이 찾아들고 있다. 그 위로 야산 언덕에 우리나라 최초의 유아교과서인 [동몽선습비]와 [애한정] 그리고 이 가문의 박상진정효각이 잘 보존되어 있다.

박세무(朴世茂)1487~1564)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번, 호는 소요당, 본관은 함양이다.

증조부는 사헌부 감찰을 지낸 박의손이고 조부는 박신장이다. 아버지는 성균생원 박중검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로 담양부사 이관식의 딸이다.

큰아버지에게 배우고 김정, 김식 등과 교유하였다. 1516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천거되어 사관이 된 후 전적에 올랐으며 그해 겨울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 1536년 에조좌랑에 등용되고 이듬해 정랑에 임명된 후 사간원 헌납으로 발탁되고 예조로 돌아왔다. 가을에 연천군 현감이 되어 피폐해진 고을을 잘 다스려 부조리를 시정하자 백성들의 생활이 윤택하게 되고 고을의 창고가 채워져서 조정에서 크게 칭찬하였다. 이후 1544년 전적, 참교, 사복시정을 거쳐 안변부사로 나갔다. 이어 내자시정, 내섬시정, 군자감정을 지냈다.

그는 벼슬하는 동안 옳은 말을 잘하여 당시 세도가인 김안로에게 배척당하기도 하였다.

성품이 평온하고 고요하며 산업을 경영하지 않고 윗사람들에게 아부하지 않았으며 선을 즐기고 의로운 것을 좋아하였다. 또한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들과 우애가 깊어 화목하였다. 그가 급제하기 전 괴산의 시골집에서 생활하였는데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지어 자제를 가르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다. 그가 지은 동몽선습은 조선 중기 이후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운 학동들이 꼭 배우는 책이 되었다.

[동몽선습]은 처음에 하늘과 땅 사이 만물의 무리에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니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군신유의(君臣有義)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등 오륜이 있기 때문이라고 시작하고 있다.

총론에서는 중국의 역대 성인을 소개하고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국호와 시조를 명시하여 자주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태봉 후백제 고려 조선 등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연령별로 지켜야 할 도리를 서술하고 [예기]의 [곡례] [학기]와 [맹자] [주례]에서 덕(德) 행(行) 학예(學藝)를 발췌하여 서술했다. 서문은 영조 임금이 친히 지어 1742년(영조18년) 교서관에서 명하여 간행하게 했으며 발문은 이보다 앞서 1670년 우암 송시열선생이 했는데 임술예관본은 발견되지 않고 1759년 춘방 즉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간행한 기묘신간본이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564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글씨를 잘 썼으며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다. 괴산의 화암서원에 제향 되었다. 박지겸1549~1623)은 박세무의 손자로서 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박응립이다. 일찍부터 과거에 뜻이 없었고 재물 모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직 학업에 전념하였다.

늙은 어머니를 효로서 모심이 지극하였으며 병이 위중하였을 때 단지를 하여 연명케 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선조를 의주까지 호위하여 그 공으로 별좌에 올랐다. 그러나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하여 1614년 괴산에 낙향하여 애한정을 짓고 살았다. 그의 묘소는 괴산읍 검승리 애한정 뒤편으로 이장하였다. 화암서원에 조부 박세무와 함께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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