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는 가을
시 읽는 가을
  • 강대헌 <에세이스트>
  • 승인 2017.11.0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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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소품문 (小品文)
▲ 강대헌

세계에서 별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라고 알려진 뉴질랜드의 테카포 호수(Lake Tekapo)를 가보고 싶을 땐,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란 시를 읽어요.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이제 다 못 헤는 것은/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별 하나에 추억과/별 하나에 사랑과/별 하나에 쓸쓸함과/별 하나에 동경과/별 하나에 시와/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마리아 릴케'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떨어져 있는 누군가의 안부를 묻고 싶거나 그리울 땐, 나태주의 `멀리서 빈다'라는 시를 읽기도 해요.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사람 사는 세상이라지만 그런 사람을 찾지 못해 마음이 어수선해질 땐,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의 `나는 이런 사람이 좋다'라는 시를 읽고는 상념에 잠기기도 해요.

“그리우면 그립다고/말할 줄 아는 사람이 좋고/불가능 속에서도/한줄기 빛을 보기위해 애쓰는 사람이 좋고/다른 사람을 위해/호탕하게 웃어줄 수 있는 사람이 좋다.//옷차림이 아니더라도/편안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좋고/자기 부모형제를 끔찍이/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좋고/바쁜 가운데서도/여유를 누릴 줄 아는 사람이 좋다.//어떠한 형편에서든/자기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좋고/노래를 썩 잘하지 못해도/즐겁게 부를 줄 아는 사람이 좋고/어린 아이와 노인들에게/좋은 말벗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좋다.//책을 가까이 하여/이해의 폭이 넓은 사람이 좋고/음식을 먹음직스럽게/잘 먹는 사람이 좋고/철따라 자연을 벗 삼아/여행할 줄 아는 사람이 좋고/손수 따뜻한 커피 한잔을/탈 줄 아는 사람이 좋다.//하루 일을 시작하기 앞서/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 좋고/다른 사람의 자존심을/지켜볼 줄 아는 사람이 좋고/때에 맞는 적절한 말 한마디로/마음을 녹일 줄 아는 사람이 좋다….”

이팝나무 단풍이 참 예쁘다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 한 편 읽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요.

“가을에는/기도하게 하소서/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라는 말이 들어간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나 “마지막 열매를 알차게 하시고/이틀만 더 남녘의 햇빛을 주시어/무르익도록 재촉하시고/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소서.”라는 말이 들어간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의 `가을날'이란 시가 아니어도 좋을 듯합니다.

마음에 스며드는 시를 찬찬히 읽다 보면 앞마당의 감도 붉게 익어가고, 어설프게 썼던 시도 익어가는 그런 가을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서울도서관 외벽 꿈새김판의 가을편 문안도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저물어 가는 게 아니라, 여물어 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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