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기억
태고의 기억
  • 권재술<물리학자·전 한국교원대 총장>
  • 승인 2017.11.02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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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 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달에는 계수나무가 있고, 떡방아를 찧는 토끼도 있다. 달을 보면 시인들은 시를 짓고, 연인들은 사랑에 빠진다. 달은 참으로 인간에게 낭만적인 존재다.

그렇지만 달이 그렇게 간단한 존재는 아닌 것 같다. `달이 없다면 바다거북도 없다', 이렇게 말하면 모두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적으로 사실이다. 바다거북은 살기는 바다에 살지만 알은 모래밭에 낳는다. 그것도 물이 차지 않는 모래밭이어야 하니 해변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어야 한다. 물에만 사는 거북이가 뭍에 나와서 오래 머문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거북을 노리는 포식자는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도 있기 때문이다. 거북은 모래밭에 알을 낳아서 묻고 빨리 바다로 돌아가야 한다. 이러한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고 번식을 하려면 가급적 산란 장소와 물과의 거리가 가까워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가까워도 밀물이나 파도에 알이 침수되면 안 된다. 그러니 산란 장소는 물에서 너무 멀어도 안 되고 너무 가까워도 안 된다. 이런 조건을 감안하면 알을 낳을 가장 좋은 장소는 밀물, 다시 말하면 만조일 때 바닷물이 올라오는 바로 바깥이어야 한다. 바다거북은 이때를 기다렸다가 빨리 알을 낳고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뭍에 나와 있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그래서 바다거북은 사리일 때를 기다렸다가 알을 낳는다. 그리고 깨어난 알은 어미가 알을 낳는 것보다 더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느린 걸음으로 빨리 바다에 들어가야 하니 온갖 포식자들의 밥이 되고 만다. 이런 위험을 피하고 생존할 수 있는 확률은 5% 정도라고 하니 얼마나 치열한 생존인가?

그냥 낭만적으로만 보이는 저 달이 바다거북과 이렇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니! 바다거북이 뿐만이 아니다. 인도양의 크리스마스 섬에 사는 홍게는 반드시 하현 때 바다로 가서 산란한다. 왜 하현 때냐고? 하현은 해와 달이 지구를 중심으로 90도를 이루기 때문에 조류가 가장 느리다. 이때 산란을 해야 알이 조류에 휩쓸리지 않아서 생존율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다 생물의 산란은 거의 모두 달의 주기와 관련이 있다. 산호는 보름달일 때 산란을 하고, 굴은 반달일 때 산란을 한다. 어떤 생물은 조류가 강할 때, 어떤 생물은 조류가 셀 때, 어떤 생물은 보름에, 어떤 생물은 그믐에 짝짓기를 한다. 이런 동식물의 생태로 짐작해 보건대 달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지구 생태계는 불가능했을 것이 거의 틀림없다.

달이 지구 생태계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가깝게는 인천 상륙작전도 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큰 인천을 상륙지점으로 잡은 것도 달 때문이다. 옛날의 모든 전쟁에는 달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남녀의 사랑은 주로 밤에 이루어지는데 전기도 없던 시절 달은 남녀의 사랑에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여자들의 생리현상도 달밤에 남녀가 만나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멀리, 우리 인간이 호모사피엔스가 되기도 전, 저 파충류나 물고기이던 시절, 알을 낳던 기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기억이라는 것을 우리의 뇌 세포에 저장된 정보에만 국한하지 않고 우리의 유전자에 각인된 정보까지 포함한다면, 우리의 기억은 인간이 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의 유전자는 우리가 미물이었을 때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물리학을 공부한 나는 우리의 기억은 유전자 수준을 넘어 분자와 원자의 수준에까지 뻗어 있다고 본다. 우리는 별에서 왔기에 저 멀리 있는 별들의 기억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달은 38만 킬로미터, 태양은 1억 5천만 킬로미터, 별들은 수백, 수천, 수억 광년 떨어져 있지만 우리 인간과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존재다. 그래서 온 우주는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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