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듬과 균형
리듬과 균형
  • 이창옥<수필가>
  • 승인 2017.10.31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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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이창옥

부드럽게 어깨 위로 들어 올린 도리깨를 힘껏 내려친다. 알싸하고 향긋한 냄새가 퍼지며 꼬투리 속에서 들깨가 우수수 쏟아지는 소리가 가을 햇살 사이로 퍼진다. 생전 처음 해보는 도리깨질이다. 무섭고 서툴지만 깨 쏟아지는 소리에 두려운 마음을 잠시 잊는다. 맞은편에 있는 언니를 바라보니 도리깨를 돌리며 내려치는 동작이 거침없이 노련하다. 도리깨 살이 내 머리로 떨어질까 전전긍긍하는 내 모습과는 대조적인 모습에 신기하다.

언니의 유연한 손동작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도리깨를 들어 올리고 내려치는 반복적인 동작에서 리듬과 힘의 균형의 조화로움을 본다. 단순한 반복동작인 줄 알고 도리깨를 휘두르기만 한 내가 갑자기 우스워졌다. 리듬과 힘의 균형을 잃어버리면 도리깨 살은 여지없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맥없이 툭하고 떨어지거나 도리깨를 휘두른 내 몸 근처로 떨어졌다. 리듬과 균형을 잃어버린 도리깨는 무서운 흉기로 돌변했다. 만만하게 보고 도리깨를 집어든 내 치기가 머쓱하기도 하고 처음 해본 일이 버거워 슬그머니 도리깨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대신 밭 여기저기에 널려 들깨들을 멍석으로 들어 날랐다. 들깨를 옮기며 둘러본 밭의 풍경이 가관이었다. 올해는 유난히 산짐승들이 극성스럽다 못해 그악스럽기까지 하다고 걱정들이더니 흔적도 없이 다 뜯어 먹히고 몇 포기 남아 있는 콩은 대공만 앙상하게 남아있다. 고구마밭은 엉망진창으로 파헤쳐져 있었다. 콩 한 톨도 고구마 한 개도 수확하지 못하고 노루, 고라니와 멧돼지의 먹이로 내줬다고 어이없어하시던 친정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진 밭에 산짐승들의 또 다른 먹잇감은 겨울양식인 배추밭이었다. 오빠는 배추밭 전체에 울타리를 치는 것으로 더 이상 산짐승의 먹이로 내줄 수 없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멧돼지들이 먹이를 찾아 도심에 출몰한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로드킬 당한 고라니나 노루들은 운전을 하다 보면 자주 마주치는 일이 되었다. 고라니의 천적도 멧돼지의 천적도 없는 생태계는 이미 오래전 균형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도리깨질로 수확을 마친 들깨는 풍년이었다. 콩과 고구마의 빈자리에 들깨라도 심어 온전하게 수확을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 올해는 다른 것은 몰라도 들기름만큼은 넉넉하게 나눠줄 수 있다는 엄마의 목소리가 마냥 기쁘게 들리지 않는다. 잡곡밥의 주재료인 콩도 간식거리인 고구마도 사먹어야 하는 씁쓸한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도리깨질을 하면서 힘의 강약이 얼마나 중요한지 균형과 리듬을 망각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새삼 깨닫는다. 리듬과 균형을 잃어버린 것이 어디 생태계뿐이랴. 사람 살아가는 세상도 별반 다르지 않음을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뉴스가 말해주고 있다. 입에 올리기도 섬뜩한 범죄들과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높으신 양반들도 이미 리듬과 균형을 잃어버려 기득권을 갖겠다고 산짐승들처럼 그악스럽게 변해가는 중은 아닐까. 리듬과 균형을 잃어버린 본인들의 막중한 책임과 의무는 도리깨 살이 되어 자신들의 발등과 국민을 위협하는 흉기가 되어가고 있음을 알고는 있을까.

결 고운 가을 햇살에 욕심을 버리며 떠날 준비를 하는 단풍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자연의 리듬과 균형을 위해 욕심을 버리고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어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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