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 밑 국화
담장 밑 국화
  • 김태봉<서원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7.10.30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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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꽃은 물론이고 잎마저 시들어 떨어지는 늦가을에 도리어 꽃을 피우는 것이 국화이다. 그래서 강인함과 지조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는가 하면, 산속 깊은 곳에서도 묵묵히 피어나기 때문에 은일(隱逸)의 기품을 뜻하기도 한다.

동진(東晋)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은 국화를 특히 사랑하여 국화를 읊은 시들을 많이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백미(白眉)는 단연 음주(飮酒) 20수 중 다섯 번째 작품이다.


飮酒5

結廬在人境(결려재인경) 마을 안에 초가집 지었는데
而無車馬喧(이무거마훤) 시끄러운 수레 소리 들려오지 않네
問君何能爾(문군하능이)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 능히 그러한가?
心遠地自偏(심원지자편) 마음이 멀어지니 땅은 저절로 외지게 되네
採菊東籬下(채국동리하) 동쪽 울타리 밑 국화 송이 꺾다가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 허리 들어 멀리 남산을 바라보네
山氣日夕佳(산기일석가) 산의 기운 날 저무니 아름답고
飛鳥相與還(비조상여환) 날던 새는 서로 더불어 돌아가네
此中有眞意(차중유진의) 이 가운데 참뜻이 있건마는
欲辯已忘言(욕변이망언) 말로 나타내려 하지만 할 말 이미 잊었노라

 

보통 은거(隱居)라고 하면 사람들 왕래가 없는 깊은 산 속 같은 곳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시인의 생각은 달랐다. 마음이 속세로부터 멀어지면 기거하는 곳은 비록 사람 사는 마을이라 할지라도 심산유곡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역시 몸보다는 마음이 먼저이다. 관직 생활을 할 때 뻔질나게 찾아오던 사람들 발길이 뚝 끊긴 건 결코 수레가 다닐 길이 없어서가 아니다.

시인이 세속의 이해에 관심을 끊자 만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이런저런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들을 대하는 대신에 시인은 국화를 만나고 산을 만나고 새를 만난다.

한결같이 무욕이고 자연이다. 거스르지 않는 순응이다. 동쪽 울타리 밑에 저절로 난 국화꽃을 따다 허리를 펴 멀리 남산을 바라보는데, 마침 석양이다. 산의 기운은 아름답기 그지없고, 하루 나들이를 마치고 짝 지어 돌아가는 새들의 모습은 순진무구 그 자체이다.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경지, 삶의 참된 모습은 바로 이것이다.

봄에 내가 심지 않았어도, 가을이면 나를 찾아오는 것이 국화이다. 소박한 동쪽 울타리 밑에서 피어난 국화꽃만으로도 우리네 삶은 풍족해지고도 남는다. 무엇을 더 바라는가?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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