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기록의 중심 ‘충주사고’를 찾아서
역사 기록의 중심 ‘충주사고’를 찾아서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7.10.2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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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역사기행
▲ 김명철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인류 역사상 단일왕조 역사서로서 그 규모가 가장 크다. 조선시대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이 책은 전체가 1893권, 888책이며, 필사본과 인본, 정족산본, 태백산본이 일괄적으로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97년에는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조선은 귀중한 역사를 안전하게 보관할 `사고'를 만들어 그 기록들을 보관했는데,`춘추관사고'와 `충주사고'이다. 내사고인 춘추관사고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외사고가 충주에 있었다. 그런데 세종 때에는 2개의 사고로는 실록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추가로 건립하여 조선 초기에 4개의 사고가 운영됐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에 4개의 사고 가운데 춘추관사고, 충주사고, 성주사고가 불에 타면서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도 모두 불타 없어졌다.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지역민과 관리들의 노력으로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는 사고를 보다 안전한 산속에 설치하는 방안이 제시되어, 강화도 마니산, 평안도 묘향산, 경상도 태백산, 강원도 오대산에 외사고가 설치되어 내사고인 춘추관과 함께 5개의 사고 체제로 운영된 것이다.

조선전기 2개의 사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외사고가 바로 충주사고였고, 이 사고가 충주 정토사에 있었다. 정토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절로 개천사라고도 불렸다. 충주사고가 처음 설치되어 역사적인 자료들을 보관하게 된 것은 고려시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서였다. 1379년(우왕 5) 9월 왜구가 경상도 내륙까지 침입해 오자 당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역대실록을 경북 선산의 득익사로 옮겼다. 3년 후 왜구들이 더 내륙인 안동까지 침입하자 바로 이곳 충주의 개천사로 옮겨 보관했던 것이다. 그러다 1383년 6월 왜구가 내륙까지 침입해오자 충주 개천사의 실록이 경기도 안성의 칠장사로 옮겨졌고, 왜구가 서해안으로 침입해오자 다시 충주 개천사로 옮겨지는 곡절을 겪게 되었다.

그리하여 개천사의 충주사고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외사고의 구실을 담당했으며, 1439년(세종 21) 7월 전주와 성주 등에 외사고가 확충될 때까지 조선 초기의 유일한 외사고 였다. 조선 건국으로 충주의 객사 동남쪽에 실록각을 지어 개천사의 사적들을 이곳으로 옮겼다. 충주사고는 고려시대 외사고의 전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다른 외사고들 보다 중요 서적을 많이 소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버렸기 때문에 소장했던 서적의 종류나 규모를 알 수 없다.

실록은 규모의 방대함과 아울러 조선시대의 정칟외교·군사를 비롯해 사상·윤리·도덕·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 비록 지배층 위주의 관찬 기록이라는 한계성이 있지만, 실록은 춘추필법에 따른 사관의 기록정신을 바탕으로 편찬돼 임금도 볼 수 없다는 원칙하에 기록됐다. 당시의 국정사항뿐 아니라 민중의 생활상까지 기록돼 있는 실록은 가히 조선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운 가을날, 충주댐으로 물에 잠겨버린 개천사(정토사)를 찾아가려 한다.

그곳에서 조선의 역사의식과 미래 사회를 살아갈 후세에게 남겨주려던 조상의 마음을 느끼고 싶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우리의 미래를 위협해도 따뜻한 가슴과 열정이 살아 있는 인간의 기록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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