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등(風燈)
풍등(風燈)
  • 김경순<수필가>
  • 승인 2017.10.24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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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 김경순

세상의 모든 일은 기술이 필요하다. 그 기술에는 방법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중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기술은 방법이 어떻느냐에 따라 승패가 가름난다.

나는 분명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상대가 나를 신뢰한다면 그에 대한 이유가 있을 터이다.

아마도 자신을 향한 태도와 마음에 느끼는 무언의 경애감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본다.

자신의 이야기에 그윽한 눈빛으로 대답해 주고 입 꼬리를 올릴 듯 말 듯 미소 지어 주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일은 행복감 그 자체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요즘 같이 바쁜 세상에 자신의 이야기를 진득하니 들어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느라 남의 이야기는 들어줄 엄두도 못 내게 된다. 카페를 가거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가면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느라 바쁘다. 그러기에 하루가 다르게 일어나는 주변의 일들, 쌓이는 스트레스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안고 사는 화병의 이유이다.

요즘 나에게도 몸과 마음에 변화가 오고 있음을 직감한다. 변화는 1년 전쯤 몸이 먼저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마음도 심상치가 않다. 깜빡깜빡 잊는 일의 횟수도 잦아졌고, 조그만 일에도 버럭 화를 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서러워 눈물을 훔치는 날도 있다. 문득문득 그간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 보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 대해 후회라고는 없었는데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부질없단 생각도 슬며시 내 마음속에 들어와 앉는다. 좋아하지 않던 캔 맥주도 냉장고에 채워 놓고 날름날름 먹던 것이 이제는 즐기는 듯도 보인다.

이런 증상을 누구는 갱년기의 다른 말 `사추기'라고 한다. `사추', 한자로 보면 `思秋'이다. 가을을 생각하는 시기, 그 말은 이제 겨울도 머지않았다는 뜻이리라. 평범보다 못했던 가정 형편으로 사춘기가 뭔지도 모르게 살아온 내가 이즈막에 사춘기를 앓고 있다. 속된 말로 `복에 겨워'이런 것을 겪는 것일까. 아이들도 이제 어엿한 성년으로 제 돈벌이를 하고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바쁘게 생활을 하고 있다. 남편 또한 철모르던 신혼 때의 그 힘든 사람도 아니건만 무엇이 내 가슴을 짓누르는 것인지 모르겠다.

요즘 내 모습이 영락없는 `바람 앞에 등불'이란 생각이 든다. 바람이 부는 대로 감정이 요동을 친다.

마음이 통하는 지인과 한참을 이야기라도 하고, 바람이라도 쐬고 오면 그 순간은 행복하다가도 또다시 혼자 있는 시간이 찾아오면 서러워지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이 계절, 가을 산은 온갖 치장을 하고 사람들을 유혹하건만 나는 전혀 동요되지 않는다.

저 단풍이 지고 나면 이제 곧 눈보라가 치고 온 세상을 얼어붙게 할 겨울이 닥쳐오리라는 것을 알기에 지레 겁을 먹은 것은 아닐까. 많은 여성들이 인생의 계절 중 가을의 문 앞에서 이리도 두려운 까닭은 저 너머 어디쯤엔 `죽음'도 한 발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제부터는 차분히 자신의 삶을 정리해야 하는 시기임도 직감하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내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이 듦의 기술'이다.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앞으로 남의 일처럼 멀게만 보이던 것들이 내게 더 빠르게 바짝바짝 다가옴을 체감하게도 될 것이다. 그때마다 나이 듦의 속도 앞에 맥없이 무너질 수는 없다. 이제라도 내게 찾아온 몸과 마음의 변화에 순응하고 내 삶의 계절도 즐기며 살아가리라 다짐해 본다. 만산홍엽이 내 마음을 곱게 물들일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말이다.

나는 지금 별이 가득한 가을 밤하늘에 `사추기'의 마음을 닮은, 붉은 풍등들이 깜깜한 하늘에서 훨훨 날아 타오르기를 빌고 있다. `사추기'는 끝이 아닌, 삶의 또 다른 시작임을 자축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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